논두렁 길 위에 두 개의 유모차가 나란히 서 있다. 허리 굽고 걷기가 힘든 할머니들이 보행보조기 삼아 쓰는 것이다. 하나는 본처, 다른 하나는 후처의 것이다. 말만 들으면 살벌할 것 같지만 큰 댁 최막이(90) 할머니와 작은 댁 김춘희(71) 할머니는 무려 46년이나 한 집에서 살았다. 두 사람의 남편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고 자식들은 출가해 믿고 의지할 사람은 서로 상대뿐이다.
할머니들의 이름에서 따온 다큐영화 ‘춘희막이’는 오랜 세월 동무처럼 때로는 자매나 부부처럼 산 할머니들의 사연을 담고 있다. 질긴 인연은 막이 할머니가 아들 둘을 태풍과 홍역으로 잃으면서 시작됐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옛 어머니들의 죄책감과 바람을 피는 남편 때문에 첩을 들일 결심을 한 할머니. “모자란 이가 오면 내 밑에 살까 싶어 데려왔지. 아들 하나 낳으면 보내버리려고 했어.”
정신지체 장애로 7~8세 지능을 가진 춘희 할머니는 그렇게 스물 네 살에 첩살이를 시작했다. 춘희 할머니가 2남1녀를 낳았지만 막이 할머니는 그녀를 내쫓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더라고 그럴 수가. 내 양심에.”
두 할머니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사료 한 포에 1만6,500원이여. 열 포면 얼마겠어”라며 개 사료 값까지 훤한 막이 할머니는 틈만 나면 1만원 1,000원짜리 돈의 단위를 춘희 할머니에게 가르친다. 때로는 눈에 안약을 넣어주며 “(고개를) 제껴라!”고 하고, 필요 없다는 뜨거운 목욕물을 떠오면 “지랄한다”며 거친 표현을 일삼는 막이 할머니. 한 손에 담배를 입에 물며 춘희 할머니를 바라보는 그 마음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숫자나 돈의 단위도 모를 것 같은 춘희 할머니가 막이 할머니를 위해 불에 구운 고구마를 꺼내 세어 보고, “만원과 1,000원 중에 뭐가 커요?”라고 묻는 딸의 질문에 거침 없이 “만원!”이라고 답하는 모습에선 울컥한다.
하지만 복잡미묘한 둘의 관계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춘희 할머니를 진찰한 의사가 막이 할머니에게 “어머니 되십니까?” 묻자, “우리 영감 세컨부(세컨드)요!”라고 받아 치는 장면은 그렇게밖에 단정지을 수 없는, 가깝고도 먼 사이임을 드러내 쓴웃음을 짓게 한다.
영화는 3년 간 두 할머니의 곁을 지키며 촬영한 박혁지 감독의 첫 장편작품이다. 그가 2009년 다뤘던 OBS 다큐 ‘가족: 여보게, 내 영감의 마누라’를 영화화했다. 독립 PD 출신인 박 감독의 차분한 연출력과 음악감독을 맡은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따듯한 선율이 영화의 정서를 깊게 한다. 30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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