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시즌 초중반 돌풍의 핵이란 언론의 표현과 그 열기를 기억한다면 극적인 반전이다. 한 야구팀의 성적이 떨어진 요인, 이에 책임이 있는 리더를 분석하는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눈여겨보는 지점은 따로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종종 김성근 감독을 비판할 때, 높은 수준의 지식을 동원한다는 점이다. 팬들은 김성근 감독의 모습에 기꺼이 한국 사회를 대입해본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혹자는 김성근의 팀 운영을 ‘산업화 시대의 리더십’이라 해석한다. 아무개는 그가 ‘신자유주의가 낳은 성과지상주의’를 보여주는 인물이라 평하기도 한다.
스포츠와 기업을 ‘힙한 경영 철학’으로 엮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흐름을 볼 때, 한 야구인의 리더십에 관한 사회 비평적 시선도 그리 놀랍진 않다. 다만 이러한 논의의 추이를 지켜보면 의아한 구석은 남는다. 가령 팬들은 팀 성적이 나빠지면 감독과 선수를 분리시켜 놓고 자신만의 논리를 짠다. 여기서 감독은 떠날 사람, 선수는 남아 있는 사람으로 규정된다.
감독이든 선수든 프로의 생리에 따라 일시적 계약에 의해 움직임을 감안할 때, 이 구도엔 어떤 착시가 도사린다. 착시를 좌우하는 건 계약 기간 여부가 아니라 ‘리더십’이다. 지도자의 리더십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여전히 지도자 ‘개인’의 특성에 초점을 맞춘다. 허나 나는 리더십이 한 사람의 빼어난 카리스마 혹은 조직을 수평적으로 대하는 훈훈한 소통 능력 따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리더십은 관계적이다. 즉 리더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구성해가는 언어다. 리더를 따르고자 하는 팬들의 감정도 반영된다.
고로 리더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가장 손쉬운 반응은 자신이 리더에게 쏟은 감정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 과정엔 나와 타인을 가담자와 비가담자로 흔히 나누는 시선이 담겨 있다. 이때 사람들은 ‘종교적’이란 비유를 들고 온다. 여기서 종교적이란, 나는 그 리더의 실책을 익히 알고 빠져 나왔는데, 너는 아직도 거기서 허우적대고 있구나 라며 타인을 질책하는 태도다. 종교적이란 비유법은 한 사회가 휩싸인 광풍을 예민하게 짚어내는 데 쓰이기도 하나, 자신만이 ‘진정한 희생자’라는 자의식으로 흐르기 쉽다. ‘나’는 이성적, 남은 종교적(감정적)이란 프레임이 쉬이 만들어지고 자신은 열기의 참여자가 아니라며 안도한다. 이 안도감은 에세이스트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말했듯 오늘날 사람들이 스스로 희생자의 자리를 찾아가려는 경향과 닮았다.
자신을 희생자로 내세울 때 나오는 착시는 ‘불편=비판’이라는 지점이다. 비판의 언어가 물렁물렁해지고 그 자리에 고통과 상처라는 관점이 득세한 지금, 어느덧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비판하기란 나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을 제거하면 된다는 태도로 쪼그라들었다. 비판은 ‘치워버림’에 머문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부당하게 일터에서 쫓아내버리는 기업인의 마인드는 이내 일상 가운데 ‘해고 놀이’ ‘하차 놀이’ ‘경질 놀이’로 변질된다. 이 놀이는 흔히 예상하듯 정의롭지 못한 갑을 향한 응당한 처사가 아니다. 어떤 문제를 비판한다는 게 누군가를 그 자리에서 잘라버리기만 하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자동반사적인 행동이다.
이를 통해 나는 한 야구인의 존속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를 나그네로 생각하고 다른 감독을 또 찾으면 된다는 식의 전형적 패턴이 변화를 위한 핵심인가라는 고민이다. 설령 김성근이 팀을 떠난다고 해도, ‘김성근적인 것’으로 비롯된 뿌리 깊은 병폐가 팬인 ‘나’의 마음엔 전혀 남아 있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한 프로야구 팀의 사정을 성적 지상주의에 물든 혹사야구 대 미래를 내다보는 관리야구로만 짚기엔, 어느 노 감독의 말년이 주는 의미가 사회에 주는 울림은 꽤 커 보인다.
김신식 감정사회학도·‘말과활’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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