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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 빛나는 조연(助演)

입력
2015.09.1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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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낮춰 상대를 높이는 지혜

본분에 맞게 자신을 제어하는 마음

역사 이끌어 가는 아름다운 ‘메이커’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자녀들과 친척 동기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번에는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아무래도 옛날 얘기가 낫겠다.

한 노인과 청년, 공자(왕의 동생)가 등장한다. 주변국들과 전쟁이 잦았던 시절, 공자는 왕을 도와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었다. 방방곳곳에서 인재를 모아 식객으로 대우하며 그들로부터 여론과 정보를 수집하여 왕에게 진언하는 핵심참모다. 어느 날 주변사람들에게서 칠순이 넘은 한 성문지기 노인이 식견 높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나보니 연륜에 맞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많이 알고 있었으며 사건에 대한 통찰력도 범상치 않았다. 함께 지내기를 요청했으나 노인은 “늙은이는 늙은이의 할 일이 있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공자가 친지들과 잔치를 벌이는 날이었다. 노인이 초청을 사양하자 공자는 손수 마차를 타고 모시러 갔다. 노인은 마지못해 공자의 마차에 탔다. 백성들이 많이 모인 장터에 이르자 노인은 잠시 마차를 세워 줄 것을 요청했다. 마차에서 내린 노인은 푸줏간 앞에서 한 청년과 대화를 나누었다. 별 의미 없는 얘기인 듯한데 쉽게 끝나지 않았고, 공자는 마차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잔치장소에 도착했다.

사연을 들은 손님들은 노인네를 비난했다. 푸줏간 백정과 수다를 떠느라 시간을 지체했다고. 급기야 손님들은 노인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제가 푸줏간 백정과 잡담을 나누는 동안 공자님은 말없이 기다려 주었습니다. 저는 공자님의 그러한 성품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장터의 백성들은 저를 예의 없는 늙은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를 욕하던 백성들은 하나같이 기다려주는 공자님의 인품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버릇없는 늙은이는 곧 잊혀지고 도량 넓은 공자님은 천하에 오래 알려질 것입니다. 이 늙은이가 공자님의 후의에 보답할 길은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이웃나라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성문지기 노인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비 계책을 공자에게 귀띔해 준다. 그리고는 혹 자신도 모르게 비밀을 누설할까 우려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계책에는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이 포함돼 있었는데, 노인이 천거한 푸줏간 청년이 그 일을 맡는다. 전장의 선두에 섰던 공자는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다. 청년은 “백정은 백정이 할 일이 있다”며 다시 푸줏간으로 돌아간다.

중국 전한(前漢)시대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당연히 왕과 장수, 승상과 책사 등을 중심으로 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성문지기 노인이나 푸줏간 청년과 같은 필부의 기록은 이 이야기가 거의 유일하다. B.C.220년대 북쪽 위(魏)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자 신릉군(信陵君)과 함께 노인은 후영(候?), 청년은 주해(朱亥)라고 뚜렷이 기록돼 있다.

노인 후영의 행동은 일부러 자신을 낮춤으로써 자연스럽게 타인을 높여 세상의 여론을 리더에게 모아주는 모습이다. 청년 주해의 처신은 스스로의 위치와 할 일을 파악하여 조직의 견실한 톱니바퀴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공자 신릉군의 배려와 아량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주인공은 신릉군일 수 있겠지만, 후영과 주해는 ‘주연을 능가하는 빛나는 조연’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모든 조직이라면 이야기 속 노인과 청년의 모습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최근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성문지기나 백정 역할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노인과 청년’이 스스로 제 몸값을 높이지 못해 안달을 부리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불 수 있다. 정치권, 특히 야당이야말로 개개인이 스스로를 낮추면서 지도자나 리더를 돋보이게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고,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탄탄하게 지키는 자세가 긴요하다. 만약 모두가 ‘킹’이 되겠다면 ‘킹메이커’는 누가 할 것인가. 정당의 성패, 정치적 승리에는 주연 못지않게 빛나는 조연의 활약이 아름답다.

정병진 논설고문 bj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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