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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선] 또다른 ‘세모자 사건’이 없기를 바라며

입력
2015.09.1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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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한 중년여성이 법률상담을 하러 왔다. 어떤 부부를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부부가 자신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퍼뜨려서 직장을 관둬야만 했다는 거다. 안 좋은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 물어봤으나 구체적인 답변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회사를 관둔 여성은 홀로 패키지 여행을 떠났는데, 일행이 모두 자신을 노려보며 수군거렸다고 했다. 이미 그 부부가 자신이 여행을 떠날 것을 알고 패키지 일행들을 모두 섭외해 안 좋은 이야기를 퍼뜨린 상태라고 했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자신도 의문이라고 했다. 그 부부가 ‘높은 분’들과 많이 가깝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별 수 없이 패키지 여행 중간에 이탈해 인근 찜질방에서 잠을 청했는데, 이번에는 그 찜질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 하더라는 거다. 알고 보니 그 부부가 인터넷에 자신에 대한 허위사실을 올렸고, 그래서 찜질방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손가락질 한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의 글을 직접 봤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보기 전에 그 부부가 재빨리 글을 내려서 어떤 내용을 올렸는지는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필자가 연이어 지방에 있는 작은 찜질방 고객들이 인터넷에 올려진 그 사람이 아주머니랑 같은 사람인 것을 어떻게 알아보았겠느냐 물었더니, 자신의 사진까지 올린 것으로 안다고 답변했다.

마지막이 백미였다. 아주머니는 그렇게 찜질방에서도 쫓기듯 나와 집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이번에는 그 아주머니의 딸이 그 악마 같은 부부의 사주를 받고 자신의 방에 CCTV를 설치했다고 했다. 그 CCTV를 확보했는지 묻자, 예상대로의 답변이 돌아왔다. 자신이 눈치챈 것을 알고, 딸이 치워버렸다고 말이다.

상담비는 당연히 받지 않았고 조용히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나갔다. “입증자료가 부족하여 고소가 어렵겠습니다”라며 조심스레 수임을 거절했다. 어쩌면 아주머니는 다른 변호사를 찾아가서, 나 또한 그 부부에게 사주를 받아서 일부러 사건을 은폐하려 들었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자신과 두 아들에게 수년간 가학적인 성폭행을 가했다는 주장을 담은 일명 ‘세모자 성폭행 의혹 사건’. 유튜브 영상 캡처.
남편이 자신과 두 아들에게 수년간 가학적인 성폭행을 가했다는 주장을 담은 일명 ‘세모자 성폭행 의혹 사건’. 유튜브 영상 캡처.

인터넷이 한참 시끄럽기 전, 필자는 세모자 사건(▶ 관련 기사)을 조금 일찍 접했다. 페이스북 친구들이 필자에게 그 뉴스를 전하며 “도와달라” 요청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동문마저 좀 나서 줄 것을 내게 부탁했다.

두 아들의 엄마인 이정희씨가 인터넷에 올린 글과 동영상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몇 해 전 나를 찾아 온 그 중년여성 생각이 났다. 내용은 끔찍했으나, 진술의 구체성이 떨어지고 신빙성도 떨어졌다.

친정식구들마저 공범으로 모는 부분에서는 확신이 생겼다. 이쯤 되면 거짓이거나 망상일 것이라고. 미국 수사기관 및 한국 수사기관 각종 언론에 제보를 했는데도 다뤄주지 않았다는 것 또한 그 확신을 도왔다. 아마 혐의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사가 진척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현 미국 대통령이 성추문을 일으켜도 대서특필하고, 전직 국회의장이 성추행을 해도 대서특필하는 세상인데, 어떤 초우주거대권력이 있어서 미국, 한국 가리지 않고 모든 언론의 입과 눈을 가린다 말인가. 특히나 미국은 아동 포르노를 소지만 해도 처벌할 정도로 아동성범죄에 엄격한 곳인데, 이런 문제를 눈감아 줄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사를 개시한 쪽에 한 다리 건너 알아보니, 진술에 모순이 많고 있다고 한 증거도 죄다 사라졌다고 하는 등 믿지 못할 부분이 많다는 답변이 나왔다.

내게 페이스북을 통해 메시지를 준 사람들에게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 것인가. 당신들이 속은 것 같다고?

그렇게는 답변할 수 없었다. 그들의 선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은 남들의 선함을 굳이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남을 속이지 않으니까, 남도 자신을 속일 것이라는 생각을 차마 못 하는 것이다. 속인 사람이 문제지, 진짜인 줄 알고 진심으로 마음 아파한 사람들을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치에 비추어, 사안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필자도 몇 해 전 그 중년 여성 일을 접해 봤으니까 세 모자 사건을 의심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같이 속고 분노했을 지도 모른다. 일례로 필자 또한 하버드 대학교와 스탠포드 대학교에 동시 입학했다는 천재 소녀 이야기를 진짜인 줄 알고 함께 박수를 쳤다. 아이비리그에 진학한 적이 없으니,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도 못 한 것이다.

따라서 그 선의를 비웃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선의를 기초로 한 믿음 때문에 피해자가 발생할 경우는 우리가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 자제하고 냉정히 볼 필요는 있을 듯하다. 나도 싫다. 왜 우리가 세상사람들의 말을 자꾸 의심하고 들어야 하나. 그건 법조인들이나 언론인들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선의를 기초로 한 믿음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커다란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여러 번 경험하지 않았는가. 세모자 사건의 남편은 어떤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그럼 인터넷을 통해 호소하는 피해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악마와 유사할 정도의 가해자로 모는 경우, 그런데 그 가해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제대로 진술하지 못하는 경우, 또한 그 지독한 가해로부터 벗어날 노력을 오랫동안 하지 않는 경우에는 살짝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분노는 조금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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