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쓰고 공연을 한 적 있다. 출연자 모두 밀라노에서 날아온 가면을 썼다. 가면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마음에 드는 가면을 골라 쓴 시인들이 시를 읽거나 간단한 퍼포먼스를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목소리에도 움직임에도 평소완 다른 엄격함이 부여됐다. 답답하기보다 편안했다. 자신은 가려지고 눈앞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맨 얼굴일 때보다 더 또렷해졌다. 탈 하나를 뒤집어썼을 뿐인데, 뿌옇게 쌓여있던 시선의 막이 걷히는 기분이었다. 눈이 똑바로 뜨이고, 마주한 사람의 얼굴이 편견 없이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부러 표정을 만들거나 감정을 꾸밀 필요가 없었다. 얼굴을 가렸는데,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더 많은 게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라니. 이상한 역설이랄 수 있다. 이를테면, 물리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을 땐 얼마나 많은 억지 표정과 허식으로 스스로를 감추고 있었는가 하는 것. 가면 안에선 비로소 안면 근육이 풀리며 아랫배와 흉곽을 정직하게 통과한 진짜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득, 가면을 써야만 힘이 생기는 영화 속 슈퍼히어로 따위를 떠올렸다. 가면을 쓰지 않았을 때의 유약함과 가면을 썼을 때의 강인함 사이의 진위(眞僞)에 대해 따져봤다. 어떤 게 진짜인지보다 어떤 게 더 분명한가에 방점이 찍혔다. 내가 내게 속는 느낌. 맨얼굴을 만져봤다. 이게 진짜 가면이지 싶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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