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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YK 4色 잉크로 디지털이 흉내 못낼 정밀한 색감 표현

입력
2015.09.1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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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골목에 자리한 원색인쇄 전문…색감 까다로운 전시회 도록 등 제작

인류의 지혜가 담긴 인쇄기술

디지털시대에도 깊은 의미 간직

급지장치는 공기압을 이용해 종이를 들어올려 인쇄기에 넣는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급지장치는 공기압을 이용해 종이를 들어올려 인쇄기에 넣는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요즘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국말로 나온 책들은 인터넷에 전문이 올라와 있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자본론에서부터 돈키호테까지 철학, 역사, 문학, 과학을 망라하는 서양의 유명한 고전들은 다 원문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따라서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책을 많이 보라”고 말하기보다 “인터넷에서 PDF파일을 많이 찾아 봐라”고 얘기하는 것이 더 맞을 듯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많은 책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책이 종이와 잉크라는 물질로 된, 의미의 고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내려 받은 정보는 쉽게 없앨 수 있고 소비되지만 종이에 인쇄된 글씨는 그 종이가 존재하는 한 남기 때문이다. 종이는 결국 숲에서 온 것인데, 종이에 인쇄된 글씨를 읽는다는 것은 숲과 문명의 연계를 체험한다는 심오한 차원도 있는 것 아닐까? 그 책이 하이데거의 철학책 ‘숲길 Holzwege’이 아니라 싸구려 통속소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소수만 접하는 고독한 기계, 인쇄기

사실 인터넷의 발달이 종이책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출판계는 장기 불황에 시달리고 책의 제작과 판매부수는 줄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약이 나오고 에너지 드링크가 나온다고 해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인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에다가 실체가 뭔지도 알 수 없는 0과 1의 조합으로 된 허깨비 같은 기호들을 입력하는 것에 비하면 종이에 잉크를 꾹 눌러서 찍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의미의 근거가 돼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쇄소를 방문한다는 것은 의미의 근원을 찾아서 산 속 깊이 숨어 있는 절을 찾아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문성인쇄는 남산 밑 깊은 골목에 숨어 있다. 인쇄소가 책 찍어내는 공장이라지만 무조건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곳은 아니다. 특히 원색 인쇄를 전문으로 하는 문성인쇄는 사진이나 그림이 가진 민감한 색채를 재현해내기 위해 정성스럽게 수작업을 하듯이 인쇄하는 곳이다. 인쇄기계의 메커니즘은 어느 인쇄소나 다 비슷하지만 인쇄공정을 관리하는 마스터라 할 수 있는 기장이 얼마나 세심하게 손을 쓰느냐에 따라 인쇄의 질은 천차만별 달라진다. 문성인쇄는 색감을 아주 까다롭게 따지는 전시회 도록이나 작품집을 많이 만든다. 아마 인쇄업만큼 작업자의 숙련도나 감각이 좌우하는 분야도 드물 것이다. 같은 자동차라도 누가 모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성질의 기계가 되듯이, 인쇄소도 기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쇄가 나온다.

네 개의 유닛이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 검정색의 순서로 색을 찍게 된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네 개의 유닛이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 검정색의 순서로 색을 찍게 된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인쇄소의 핵심은 당연히 인쇄기계다. 문성인쇄에는 Komori Lithrone 40이라는 인쇄기가 있다. 이 기계에 대해 구글에 검색해 보면 오로지 Komori의 홈페이지만 나온다. 이는 인쇄기계가 일반인의 인식체계에 들어 있지 않은, 오로지 인쇄라는 분야에서만 이해되는 특수한 기계임을 의미한다. 코모리 인쇄기를 쓰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몇 안 된다. 인쇄기계는 조선소의 대형 크레인처럼 아주 특수한 소수의 사람들만 다루면서 일반인들 사이에 보편적인 인식이 성립돼 있지 않은, 고독한 기계다. Komori Lithrone 40은 CMYK(사이안ㆍ마젠타ㆍ옐로우ㆍ블랙, 즉 청ㆍ적ㆍ황ㆍ흑)의 네 개 유닛으로 구성돼 있다. 각 유닛 속에 수많은 롤러들이 들어 있어서 CMYK 중 한 색을 찍어낸다. 그 네 개의 유닛들을 기장과 보조인원이 애지중지하며 정밀한 색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떤 사진가는 색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일주일이나 인쇄를 다시 시켜서 기장을 애먹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인쇄과정은 아주 면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인쇄될 면이 화학적으로 처리된 PS판. 이 판 네개가 모여서 하나의 색을 만들게 된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인쇄될 면이 화학적으로 처리된 PS판. 이 판 네개가 모여서 하나의 색을 만들게 된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인쇄될 그림이 찍힌 PS판이 인쇄기에 걸려 있는 모습.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인쇄될 그림이 찍힌 PS판이 인쇄기에 걸려 있는 모습.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잉크를 찍는 원리: 물과 기름의 반발력

사실 인쇄의 기본원리는 간단하다. 판에 잉크를 묻혀서 종이에 찍어내는 것이다. 사진을 인쇄하는 보편적인 방식을 옵셋인쇄라고 하는데, 물과 기름의 반발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옵셋이란 말은 인쇄면에 묻는 얼룩을 의미한다. 즉 얼룩면에 유성(油性)인 인쇄잉크는 묻지만 물은 묻지 않는 성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우선 인쇄를 하려면 원색 사진의 색을 CMYK의 네 가지로 나눈다. 각 색은 PS판(presensitized plate, 즉 감광성이 있는 판)에 감광제로 처리되어 인쇄될 수 있는 면을 이룬다. 즉 한 장의 사진에 대하여 네 개의 판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네 개의 판이 각각의 색을 따로 찍어서 그 색들이 합쳐지면 원하는 색이 나온다. 말은 간단하지만 풍경사진을 척 보고 멋진 풍경이라고 인식할 수 있도록 인쇄하려면 매우 정밀한 공정과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가족이 수술에 들어갈 때 담당 의사 선생님께 간곡히 부탁하듯이, 책을 찍을 때 기장에게 간곡히 부탁해야 한다. 물론 프로페셔널한 기장이라면 자신의 만족도를 위해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좋은 인쇄를 위해 애쓸 테지만 말이다.

원리가 갖춰졌다고 해서 바로 인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인쇄용 판에 찍힌 이미지는 망점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점들로 구성돼 있다. 그 망점들은 CMYK의 네 가지로 돼 있어서, 그 점들이 어떻게 구성돼 있느냐에 따라 다른 색이 나온다. 문제는 정밀한 인쇄를 위해서는 망점들이 잘 찍혀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장은 인쇄가 돼서 나온 종이를 곧바로 뽑아서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망점들이 잘 찍혔는지,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보는 것이다. 정밀한 인쇄를 위하여 PS판으로 곧바로 찍는 것이 아니라 고무 ‘부랑케’(블랭킷)에 전사하여, 거기에서 종이에 인쇄한다. 말은 블랭킷인데 평면은 아니고 원통형이다. 인쇄의 첫 과정이 바로 종이에 잉크를 찍는 것은 아니다. 앞서 옵셋인쇄라는 것이 물과 기름의 반발력을 이용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이용하려면 종이에 잉크를 묻히기 전에 물을 먼저 묻힌다. 그 후 판면에 잉크를 묻혀서 블랭킷이 종이에 잉크를 찍는 것이다. 알코올로 산도(Ph)를 조절하여 약산성으로 맞춰 놓은 이 물은 인쇄판의 그림이 없는 부분, 즉 친수성인 부분에 잉크를 묻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림이 있는 부분에는 잉크가 가지고 있는 친유성 때문에 유성인 잉크가 찍히게 된다.

현대의 모든 기계들이 그렇듯이 인쇄에서도 속도가 중요하다. 만일 유성 잉크가 찍혀 나온 종이들을 바로 쌓아놓으면 어떻게 될까? 다 들러붙어서 아무 짝에도 못 쓰게 된다. 그래서 인쇄기의 아래 쪽에는 미세한 분말을 분사해주는 장치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분말들이 방금 인쇄돼 나온 종이의 표면에 뿌려져서 종이들끼리 들러붙지 않게 된다.

기장이 맨 왼쪽에 잉크를 넣어주면 바로 옆의 로러를 통해 그 옆의 롤러로 전달되고, 이어 수많은 롤러들을 거치면서 골고루 종이에 묻게 된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기장이 맨 왼쪽에 잉크를 넣어주면 바로 옆의 로러를 통해 그 옆의 롤러로 전달되고, 이어 수많은 롤러들을 거치면서 골고루 종이에 묻게 된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안쇄기의 한 유닛에는 수많은 롤러들이 있어서 종이에 잉크가 골고루 잘 묻도록 해준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안쇄기의 한 유닛에는 수많은 롤러들이 있어서 종이에 잉크가 골고루 잘 묻도록 해준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인쇄된 종이들이 쌓여 있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인쇄된 종이들이 쌓여 있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인쇄돼 나온 종이를 기장이 면밀히 들여다 보고 있다. 색감은 잘 나왔는지, 망점들의 초점은 잘 맞았는지 보는 것이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인쇄돼 나온 종이를 기장이 면밀히 들여다 보고 있다. 색감은 잘 나왔는지, 망점들의 초점은 잘 맞았는지 보는 것이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망점들. CMYK의 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점들을 잘 구성해서 색깔이 찍혀진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망점들. CMYK의 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점들을 잘 구성해서 색깔이 찍혀진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제공

많은 세월과 지역을 거쳐 온 기술

인쇄의 실제 과정을 보기 위해 피더에 종이를 물려 놓고 스위치를 누르자 경쾌한 음악소리부터 들리기 시작한다. 소리는 경쾌하지만 의미는 경쾌하지 않다. 수많은 롤러들이 돌아가는 인쇄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을 집어삼켰기에, 조심하라는 경고음이다. 공기압으로 빨아올려진 종이는 인쇄기 속으로 말려들어가고, 앞서 쓴 과정들을 거쳐 ‘데리바리’(delivery) 즉 배지에 이르게 된다. 그 종이들을 잘라서 순서를 맞춰서 제본하면 책이 된다. 그런데 인쇄과정을 보면서 설명을 듣다 보니까 일본말들이 참 많이 들린다. 부랑케, 데리바리 같이 영어가 일본어화 된 것도 많고, 베다, 누끼처럼 원래 일본말인 것도 많다. 그 이유는 우선 무엇보다도 인쇄기는 대부분 독일제나 일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은 어떤 전문분야든 조금만 들어가면 용어들이 다 일본말이기 때문에 인쇄용어가 일본말인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인쇄업 바깥에 있는 사람이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온갖 일본말들이 희한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도무송’ 절차다. 인쇄용 종이를 원하는 모양에 따라 잘라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하는 기계 브랜드가 톰슨이었는데 그것이 일본말화되고 보편화되어 ‘도무송한다’는 말이 됐다. 인쇄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 도무송이 톰슨을 뜻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가장 오래된 인쇄는 신라시대인 751년에 목판인쇄로 찍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라고 한다. 1450년에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개발했으며, 지금의 옵셋인쇄는 1901년 미국의 루벨이 처음 쓴 것이다. 그 방식이 시대와 공간을 돌고 돌아 일본식 기술이 꽃피우고 마침내는 충무로에까지 오게 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책을 찍어준 그 기술은 수많은 세월과 지리적 지역들을 돌고 돌아서 우리에게 온, 귀한 기술이다.

이영준ㆍ계원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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