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장정일 칼럼] 문학의 ‘얼룩’

입력
2015.09.13 11:08
0 0

‘신경숙 사태’에 관여한 논자들은 두 편으로 갈린다. 신경숙의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문제가 된 구절과 작중의 기본 동기를 ‘활용’이라고 주장하는 ⓐ와, 문제의 구절이 표절임은 물론 작중의 기본 동기마저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 양 편은 화해할 수 없는 적군 같지만, 실상은 한 편이다. 즉 신경숙을 옹호하면서 ‘의도적 베껴쓰기는 아니었다’ ‘활용이었다’고 말하는 쪽이나 이들을 성토하는 쪽은 모두, 문학에 표절이라는 얼룩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글쓰기의 순수주의자들이다.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라고 일단 표기해 두자.

소설가 신경숙.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설가 신경숙.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느 문학평론가는 “문학에는 오로지 표절이냐 아니냐만 있는 거지. 거기에 다른 변명은 있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글쓰기 또는 문학의 공간에 난 얼룩은 이런 호언장담을 물리친다. 최근에 읽은 신영복의 ‘담론’(돌베개)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W.B. 예이츠의 시 ‘하늘의 옷감’의 모작이라는 오래된 논란을 재확인해주며,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와 김수영의 ‘풀’이 각각 백거이의 ‘국화’와 ‘논어’ ‘안연’편의 한 구절로부터 착상을 빌려 온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독후감 공모대회를 하기도 했던 방민호의 ‘연인 심청’(다산책방)은 또 어떤가? 심청을 좋아했던 마을 오빠가 첨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원본에 대한 작가의 투혼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이본(異本)이 120여개나 된다는 ‘심청전’에 또 다른 이본 하나를 보태는 데 만족했던 작가는 이런 겸손한 후기를 남겼다. “작가란 황무지에 자기만의 꽃을 심는 존재가 아니었다. 길고 깊은 문학의 전통 속에서 나타나 그것에 한 줌 흙을 더하고 사라지는 존재였다.” 방민호나 앞서 열거한 김소월ㆍ서정주ㆍ김수영은 저작권이 소멸한데다가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는 명시성 높은 작품을 베껴 쓴 탓에 법적ㆍ도덕적 면피를 받았다. 하지만 표절에 대한 이런 판정이야말로 소박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자기기만적이기까지 하다.

많은 논자들은 표절이 횡행하는 이유로 ①작가적 양심의 실종(개인의 잘못)과 ②표절을 감시해야 할 문학 장의 오작동(구조의 허점)을 제시한다. 하지만 내 희미한 기억으로는 움베르토 에코도 ‘장미의 이름’을 낸 직후 그리스 작가의 소설을 도용했다는 구설수에 오른바 있다. 그리고 신경숙 건이 일단락 난 현재, 다른 젊은 작가를 불쏘시개로 새로운 표절 논의가 번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개인이나 구조로 설명되지 않는 제 ③의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문학은 자기 자신 안에 얼룩을 가지고 있다. 논자들은 그 얼룩을 영향ㆍ모방ㆍ패러디ㆍ패스티시ㆍ인용ㆍ인유 등의 심급이나 기법으로 세분화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세분하든 문학이 존재론적으로 안고 있는 얼룩 자체는 지워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김영하의 201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는 슬라보예 지젝이 애용해서 유명해진 농담(자신을 옥수수 알이라고 착각한 사나이)을 기본 동기 삼아 씌어졌다. 이런 경우가 무엇으로 지칭되든, ‘옥수수와 나’가 문학을 가능케 하는 얼룩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만은 변치 않는다. 흔히 창작이 먼저고 표절이 그 뒤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표절이 먼저고 창작이 그 뒤를 따른다. 저 옛날,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폭로에 마음이 상했던 레슬링 팬들처럼 문학도 이제는 자기 근거를 고뇌하고 추궁할 때가 되었다. 문학은 직접 인용부호를 삭제한 자유간접화법, 즉 표절이다.

ⓐ와 ⓑ 혹은 ①과 ②가 경합하고 있을 때, ⓒ나 ③은 예외 없이 양비론이나 ‘물타기’로 비난 받는다. ⓒ와 ③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ㆍⓑ 또는 ①ㆍ②에 들러붙어 그것들을 온전치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딜레마를 회피하기 위해 이 불순물을 똥이라고 부르며 배제한다. 하지만 어느 시인이 쓴 이런 시도 있느니만큼, 우리는 똥 앞에서 진지해야 한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은/ 똥이 무서워서 피한다는/ 내 마음 속의/ 한숨 소리나 같은 것이었으니.”

장정일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