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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로 그린 자화상, 온 카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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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로 그린 자화상, 온 카와라

입력
2015.09.0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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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그리기ㆍ만난 사람 이름 쓰기 등 반복 작업… 축적된 정보가 예술작품으로

그가 막 신문 읽기를 마쳤는지 책상 왼쪽에 벗어 놓은 안경이 주인의 눈을 쉬게 만든다. 날짜를 찍는 고무도장, 가위, 볼펜, 작업 일기장, 맨해튼 지도, 3철 노트, 엽서, 삼각자, 붓과 물감 등이 보인다. 작가가 담배를 피우고 작업을 끝낸 책상은 삶과 죽음이 함께 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 준다. 그는 오늘 자신을 이렇게 지워 버렸고, 그 흔적은 축적되었다.
그가 막 신문 읽기를 마쳤는지 책상 왼쪽에 벗어 놓은 안경이 주인의 눈을 쉬게 만든다. 날짜를 찍는 고무도장, 가위, 볼펜, 작업 일기장, 맨해튼 지도, 3철 노트, 엽서, 삼각자, 붓과 물감 등이 보인다. 작가가 담배를 피우고 작업을 끝낸 책상은 삶과 죽음이 함께 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 준다. 그는 오늘 자신을 이렇게 지워 버렸고, 그 흔적은 축적되었다.

이만구천칠백칠십일(29,771) 날을 살은 온 카와라(河原溫)는 지난해 6월 27일에 그가 그리던 ‘오늘(Today)’을 더 이상 그릴 수 없는 시간이 없는 세상으로 갔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1966년부터 2014년 6월까지 그가 제작한 작품 전시전 SILENCE@을 달팽이 등껍질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전시하였다. 그의 하루는 읽고, 만나고, 걷고, 자르고 그리는 일상적 행위에서 시작하여 작업과 기록으로 끝났다. 그는 평생에 걸쳐 관청의 말단 서기처럼 묵묵히 하루의 정보를 카탈로그로 만들면서 정보가 예술과 삶으로 변해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1965년에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1966년 1월 4일에 그날의 날짜를 그리기(Today;1966-2013)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신문을 오리고, 읽은 신문과 글을 스크랩하고(I read;1966-95), 만난 사람 이름을 쓰고(I met;1968-79), 간 곳을 종이지도에 표시하고(I went 1968-79), 매일 일어난 시간을 적어 엽서로 보내고(I got up;1968-79), 아직 자신이 살아있다고 전보를 보내고(I am still alive;1970-2000), 그러다가 백년짜리 달력(1984-2012)을 두 장 만들고, 백만년(1970-1998)을 타이핑해서 기록하였다.

그는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하여 정보만을 남기고 자신의 말은 그들 뒤로 숨겼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숨기면서 자신이 하는 작업의 의미를 애써 드려내려 하지 않았다. 매일 반복하는 작업에 대해 달리 무엇을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명도 SILENCE@이다.

구겐하임 전시회와 차이의 반복

구겐하임 미술관의 달팽이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의 작품은 천정과 만나는 곳에서 멈춘다. 공간과 시간이 그렇게 절묘하게 시작과 끝을 함께 한다. 구겐하임은 온 카와라 전시에 적합한 공간이다. 구겐하임 미술관 말고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이 하나로 연결된 전시 공간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남겨놓은 공간을 온 카와라가 시간으로 채워넣은 둘의 합동 전시회라 할 만하다.

그의 작품에서 매일 반복되는 오늘은 “아직 살아있다”는 동어반복이 다른 장소에서도 계속되면서 작은 차이를 드러낸다. 매일 일어나지만 그가 일어나는 시간은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도 걸은 길도 반복되지만 같은 날은 하루도 없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린 날과 시간은 없는 것이고, 시간은 오직 변화와 차이의 숫자 정보에 불과한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그의 작품을 모아 축적된 결과를 구겐하임미술관의 공간에 걸어놓고 보니 작은 차이를 매일 반복하면서 수직으로 올라간 작가의 모습이 드러난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의 삶처럼 세상을 오직 정보의 더듬이로만 파악하면서 아무런 표현도 충동도 의지도 드러내지 않지만 그의 삶은 변화하고 지속되었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강박적 집념이나 의지, 습관의 결과로 판단하기도 힘들다. 그의 작품이 갖는 의미와 뜻을 찾는 작업은 그런 반복되는 작업 앞에서는 할 말을 잃기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작가 스스로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모른다. 나는 내가 날짜를 모은다는 것만 안다”고 말했다.

그런 작업 속에서 반복적인 나가 포괄적인 나로 증폭되었다. 그는 개별자의 삶과 시간이 세계와 무한과 닿는 지점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나를 보여주었다. 정보를 이용해서 자신을 정보로 남기는 자기삭제의 기법은 그가 왜 사진이나 인터뷰 등 통상적인 소통 수단으로 자신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았는가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정보를 모으고 정보를 잘라서 다시 배열하고 연결하여 자신을 정보로 환원한 이후에는 자신에 대해 침묵한다.

자화상, 일 끝난 뒤 책상 사진

1965년 이후 온 카와라의 얼굴 사진은 공개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그 대신 그가 모습을 비운 작업장 사진만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어떻게 작업했는가를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친 그는 작업실 책상 위에 앉는다. 안경을 쓰고 신문을 읽는다. 막 읽은 흔적이 남아있는 신문이 1979년 6월 28일 ‘오늘’의 작업과 대비되며 반으로 접혀 있다. 그가 막 신문 읽기를 마쳤는지 책상 왼쪽에 벗어놓은 안경이 주인의 눈을 쉬게 만든다. 날짜를 찍는 고무도장, 가위, 볼펜, 작업 일기장, 맨해튼 지도, 3철 노트, 엽서, 삼각자, 붓과 물감 등이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 담배와 라이터, 꽁초가 남아있는 재떨이가 놓여있다.

이 사진에서 ‘푼크툼’(주관적인 감상)을 집어내라면 보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재떨이를 꼽고 싶다. 담배처럼 흔적 없이 소진된 하루의 삶이 꽁초로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벗어놓은 안경도 그러하다. 작가가 담배를 피우고 작업을 끝낸 후, 작업장에서 비껴 서자 모든 것이 끝난 책상은 삶과 죽음이 함께 닿아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는 오늘 자신을 이렇게 지워버렸고(살았고), 그 흔적은 축적되었다.

그는 숫자와 정보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작업과 얼굴을 바꾸었다. 온 카와라의 작업은 숫자와 정보로 그려진 정보사회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기록으로 그려진 질서정연하고 반복적이고 강박적이고 규격적인 자화상이다. 그는 스스로를 숫자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주체적 자아를 지워버리고 그곳에 시간의 흐름과 바꾼 기록과 창작물을 집어넣었다.

그의 얼굴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삶을 페르시아 양탄자로 짜서 남긴 사람처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면서 기록과 작업 결과물로 자신의 모습을 짜서 남겼다. 우리는 축적과 모음을 통해 양이 질로,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커지는 현상을 만나게 된다. 그가 만든 비슷한 작품들은 한데 축적되어 함께 있으면 차이가 드러난다. 반복성이 연속성을 가질 때 그것의 형태와 의미는 ‘증식’된다. 그런 축적물을 통해 양이 질적 도약을 하게 되고 부분의 합보다 크거나 다른 어떤 체제가 우리 눈앞에 드러날 때 그의 예술적 수행은 일상의 정보 수집물을 넘어 어떤 개념과 의미를 우리에게 섬광처럼 던져준다.

그러나 기록도 기억도 삼켜졌다

그가 이용했던 작업일지, 신문, 사진, 전보, 엽서, 포스터, 지도, 수첩, 달력, 노트 등의 미디어도 하나 둘씩 세상을 뜨기 시작한다. 전보는 이미 사라졌고 스마트폰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대가 되었다. 미디어 생태계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여러 미디어가 멸종 위기를 맞는다. 공룡처럼 성장한 독점체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매일매일의 일상을 건져 올릴 개체성과 개성도 없어진다.

온 카와라는 뉴욕에서 하루 동안에 만난 사람의 이름과 자신의 이동 경로를 종이지도 위에 그리고 ‘오늘’의 서브타이틀을 그의 일기에 기록하였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나는 오늘 커낼 스트리트 B.M.T에서 백남준을 만났다. 저녁 일곱 시 사십 분(APR 21, 1967)”.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이 자동으로 내가 이동한 경로가 구글맵 위에 그려진다. 나는 걸은 게 아니라 걸어진다. 이제 더 이상 내가 걸은 궤적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내가 걸으면 스마트폰도 함께 걷기 때문에 나의 궤적은 스마트폰의 궤적으로 치환되고 그 기계의 궤적은 고스란히 구글맵 위에 색깔로 표시된다. 나는 나의 궤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그리는 대신에 맵에 그려진 궤적을 본다. 기록도 없어지고 기억도 사라지고 데이터만 살아 넘친다. 우리는 구글 손바닥 위의 손오공인 셈이다.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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