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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의 시네마니아] 다큐 '침묵의 시선' 소름 끼치는 이유

입력
2015.09.0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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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침묵의 시선'. 앳나인 제공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침묵의 시선'. 앳나인 제공

총소리 한 번 울리지 않고 피한방울조차 스크린에 흐르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의 가벼운 동작과 담담한 육성만이 스크린을 채운다. 단말마의 비명은커녕 작은 신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여느 공포영화 못지않게 온몸이 서늘해진다. 인간의 잔혹성에 진저리가 나고 권력의 냉혹한 작동원리에 소름이 끼친다. 현대사가 감추고 있는 비극을 살피고 한국의 현실을 되짚고 싶은 관객이라면 3일 개봉하는 덴마크 다큐멘터리영화 ‘침묵의 시선’과 마주할 것을 권한다.

영화는 1960년대 인도네시아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된 학살을 조명한다. 1965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산당 탄압이 시작되고 노조원과 소작농 등 100만명이 공산당으로 몰려 집단 죽음을 당한다. 군대의 비호 아래 급조된 민병대는 애국을 빙자해 인간사냥에 앞장 서고 주도자들은 손에 피를 묻힌 대가로 부와 권력을 손에 쥔다. 영화는 형을 비명에 잃은 동생 아디가 뒤늦게 학살 가담자들을 찾아가 사건의 앞뒤를 듣고 그들의 심정을 캐묻는 과정을 103분 동안 응시한다.

‘침묵의 시선’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지난날의 악행을 영웅담으로 미화하는 자들과 항변 한번 제대로 못하고 살아가는 유족들이 스크린 양쪽에 따로 선다. 한쪽은 학살의 추억에 젖어있고, 반대편은 악몽에 시달린다.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을 사이인데 이들은 같은 마을에서 생활한다. 강요된 침묵이 불안한 평화를 받친다. 피해자 가족은 피의 보복이 두려워 학살 사건을 제대로 입에 올리지 못한다. 죄를 지은 자들은 더욱 권력을 누리고, 유족들은 가난과 심적 고통에 더욱 시달린다.

영화를 보다 보면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현실을 비교하게 된다. 한국도 현대사의 격동기에 의문의 죽음들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 진상규명과 보상조치가 따른 사건도 제법 많다. 억울한 죽음에 침묵하지 않았던 이들의 억센 목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학살자들이 지난날의 행동을 아직도 자랑스레 떠벌리는 인도네시아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사회라고 위안 삼을 만 할까.

‘침묵의 시선’이 웬만한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운 영화로 느껴지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지금 이곳도 인도네시아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게 된다. 형의 죽음을 따지는 아디에게 관계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윽박지른다. “지금 군사정권 시절이면 너도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옛일을 문제 삼는 것 보니 너도 공산당이다”…. 권위주의 시절로 자꾸 고개를 돌리며 색깔론을 들먹이는 인사들에게 관람을 권하고 싶은 영화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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