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서 미스터리·괴담 작가들 참여한 무서운 그림책 시리즈 인기
공포에 침잠했던 유년기의 한 페이지 들춰내
엄마 아빠가 외출하고 혼자 놀이방에 남겨진 어느 오후. 어젯밤까지만 해도 품 속에 안겨 외로움을 달래주던 인형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플라스틱 눈알을 파충류처럼 번들대며 쏘아보는 고양이 인형, 겁에 질린 아이를 비웃는 원숭이 인형,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치 않겠다는 무심한 표정의 곰 인형. 이윽고 인형 하나가 입을 연다. “나쁜 사람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의 그림책 ‘나쁜 책’(박하)은 유년기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어둠의 기억으로 독자들을 끌고 간다. 태어나서 처음 발현된 공격성, 주체할 수 없는 잔인함에 어린 몸은 어쩔 줄 몰라 하고, 내면의 악은 가장 가까이 있는 인형들에게 투사된다.
미야베의 첫 그림책이기도 한 ‘나쁜 책’은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무서운 그림책’ 시리즈의 하나다. 일본 괴담 전문지 ‘유’의 편집장인 히가시 마사오는 2011년 일본을 대표하는 괴담?범죄?환상문학 작가들과 함께 시리즈를 기획했다. 책마다 다른 일러스트레이터가 작업한 그림은 빨려 들어갈 듯 매혹적인 공포를 더한다.
이 시리즈는 “아이들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어선 안 된다”는 그림책 업계의 터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1기 출간작 5종이 13만부 이상 판매되며 히트를 쳤다. 이번에 국내 번역된 책은 2기까지 출간된 8종 중 3종으로, 미야베의 ‘나쁜 책’, 온다 리쿠의 ‘거울 속’, 교고쿠 나쓰히코의 ‘있어 없어?’다.
요괴소설의 일인자로 불리는 교고쿠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오래된 집에서 느꼈던 공포를 되살린다. 유난히 높고 어둑한 천장. 들보 위에서 누군가 내려다보는 듯한 착란. “할머니, 천장에 누가 있어.” 할머니의 데면데면한 답변에 아이의 두려움은 극단으로 치닫고, 들보 위 사내는 현실이 된다. 환상 미스터리 소설을 주로 써온 온다 리쿠는 누구나 한번쯤 사로잡혀봤을 거울의 공포를 소재로 했다.
음산하고 괴기스런 그림책은 성인들에겐 공포의 기억을, 아이들에겐 공포에 질릴 권리를 선사한다. 부모의 바람 때문에 밝고 예쁜 것만 편식하던 아이들에게 금기를 깨뜨리는 선물이다. 역자 이기웅씨는 “그림책 구매자인 어른들은 아이에게 상처를 주어선 안 된다는 마음에 어둡고 부조리한 이야기를 경원해왔다”며 “그러나 24시간 영업으로 동네에서 어둠이 사라지는 요즘, 아이들로부터 공포를 뺏어가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에서 이 책이 기획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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