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공단은 1964년 조성된 최초의 국가산업단지다.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로 이름이 바뀐 그곳에서 작년에 대통령도 참석한 가운데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던 모양이다.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올해 베니스비엔날레에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초대되어 은사자상을 받았다)은 초반부에 그 장면을 조금 멀리서 보여준다. 그러다 후반부에 이르러 그날 그 행사장 밖의 또 다른 풍경 하나를 삽입한다. 피켓을 들고 일렬로 늘어선 이들의 모습이다. 노란 손팻말 위의 한 문장이 잊히지 않는다. “50년 전에는 공순이, 50년 뒤에는 비정규직”
‘위로공단’은 70년대부터 시작되는 우리 누이들의 이야기다. 흐릿한 형광불빛 아래 환기도 안 되는 좁은 다락방 먼지 속에서 타이밍을 먹으며 14시간씩 일해야 했던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어린 소녀들, 구사대로부터 똥물을 뒤집어쓰고 끌려가야 했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참혹한 이야기가 이제는 오륙십대의 나이에 이른 바로 그이들의 증언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배고파 못 살겠다고 외쳤죠.”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리봉 오거리 일대에 모여 있던 닭장집. 발도 제대로 뻗기 힘든 그 좁은 방에서 밤늦은 퇴근 후 라면을 끓여 먹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포개져 쪽잠을 자야 했다. 그러다 폐결핵에 걸린 이들은 그나마의 일터에서도 쫓겨나 더 참담한 곳으로 갔다. 80년대 노조활동을 하다 구속되고 해고되었던 한 여성 노동자는 웃으며, 그 시절 어린 여자 후배가 떠올린 구호를 전한다. “나도 나이키를 신고 싶다.”
그러니까, 우리는 혹 이런 것들이 얼마간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러나 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대기업 반도체 라인에서 일하다 암에 걸려 직장을 떠나야 했던 여성들. 비정규직, 파견직 노동자들의 기나긴 싸움. 콜센터에서 일하는 한 40대 여성 노동자는 작은 용돈조차 부모님에게 보내드리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다 결국 흐느낀다. 항공기 여승무원들은 육체와 감정 모두를 바닥까지 쥐어짜는 회사의 가혹한 노동 통제를 증언한다. 베트남 이주 여성 노동자가 서툰 한국어로 읽어나가는 간절한 호소, 캄보디아의 한국 공장에서 일하는 현지 여성 노동자들의 실상은 구로공단의 70년대가 지속되는 또 다른 비참의 국면을 보여준다. 여전히 일터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한 중년의 여성 노동자가 그 동안의 세월을 돌아보며 그나마 아이들을 가졌을 때가 살면서 가져본 거의 유일한 휴식이었던 것 같다고 말할 때는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큐 중간중간에는 흰 천으로 눈을 가린 채 공단 이곳저곳을 떠도는 여성, 거울 앞에 선 여성들이(소녀에서 할머니까지) 등장한다. 그런데 거울은 그이들의 온전한 얼굴을 좀처럼 비춰 보여주지 않는다. 얼굴이 우리의 존엄과 인격이 매순간 상호 인정되고 교류되는 ‘신성한’ 장소라면, ‘위로공단’이 환기하는 또 다른 차원의 아픈 진실은 그이들의 그 시간이 경제적 물리적 고통과 함께 지속적인 모욕의 시간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한 계약직 여성 노동자는 탈의실 바닥에 앉아 밥을 먹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넓은 매장에 그들이 쉴 곳, 그들만의 공간은 없다. 고공의 철탑이 그들의 자리인가.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마지막 호소는 바로 그 ‘사람의 자리’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씨는 벌거벗은 생명을 돕는 단 한 명의 존재, 그 미약하지만 절대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사회가 구성되고 정초되는 지평을 상상한다. 그리고 우리를 설득한다. “구성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하는 것, 그들 모두에게 자리를 주고, 그 자리의 불가침성을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그 환대의 이야기, ‘사람의 자리’에 대한 관심과 연대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버린 걸까.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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