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숭상하는 풍토는 그 나라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시 쓴다’는 말에는 고대부터 한민족의 정신문화를 살찌우는 데 시가 담당한 역할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빚진 바로는 이란도 못지 않다. 한때 거의 모든 문명권을 제패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풍부한 전설, 민담, 신화의 상당수는 산문이 아닌 시의 형태로 기록ㆍ구전됐다. 각종 경구가 시로부터 나왔으며 무학의 노인도 시 몇 수는 유창하게 읊을 수 있는 곳이 이란이다.
이란의 대표 현대시인 71인의 시를 모은 ‘백 년의 시간, 천 개의 꽃송이’(문학세계사)가 출간됐다. 이란의 유명 시인 겸 영화감독 포루그 파로흐자드의 시선집 등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71명이나 되는 이란 시인들의 대표작이 한 권으로 묶인 건 처음이다. 주 이란 한국대사관 김중식 홍보관의 제안으로 번역을 맡게 된 최인화 테헤란대 객원교수는 방대한 시 중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이란의 유명 시선집 두 권에서 공통된 것들을 우선 골랐다. “우리 시가 운율이 정해진 고전시와 시형이 파괴된 현대시로 나뉘듯 이란도 20세기 초 입헌혁명을 계기로 고전시와 현대시가 나뉩니다. 하지만 요즘에도 고전 정형시를 쓰는 사람이 많아요. 이번 시집엔 정형시, 자유시 구분 없이 20세기 이후 이란의 현대 시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은 다 포함시켰습니다.”
시집엔 이란 현대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니머 유쉬즈, 지식인의 아이콘이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시민 베흐바허니, 이란의 2대 여성시인 중 한 명인 파르빈 에테서미, 1979년 이슬람 혁명 이전 시대를 대표하는 터헤레 사퍼르저데 등 저명한 시인들 외에 고등학교 교사, 번역가, 기자, 정치인의 시가 포함돼 있다.
“이란에는 우리 같은 등단제도가 없어요. 노인이든 꼬마든 누구나 시를 쓰고, 단 한 편의 시를 써도 스스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시인을 정의하는 기준은 다르지만 시를 부추기는 감정의 연원은 다를 것이 없다. 연애 감정,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부모를 향한 연민, 인간의 근원적 공포,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어들은 시공을 초월해 읽는 이의 마음을 건드린다.
“나는 보았다/ 어머니가 언제나처럼 마당 수도 앞에서/ 때 묻은 셔츠를 빠는 모습을/ 어머니는 슬픔 가득한 웃음을 지으셨다/ 나를 땅속에 묻고 왔니?/ 불쌍한 내 아들, 너를 혼자 두지 않으마/ 나는 그만 웃을 뻔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이었다/ 아아, 어머니, 내 어머니” (샤흐리여르 ‘어머니, 내 어머니’ 중)
모친의 장례를 치른 아들이 집에 돌아와 어머니의 환영을 보는 이 시는 격렬한 슬픔과 공포가 뒤섞이는 찰나의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입헌혁명 이전에 쓰인 시 중엔 부패한 정부를 날 세워 비판하는 참여시도 있다.
“큰 길에 임금 행차가 있던 어느 날/ 온 고을 집집마다 터져 나오는 환호성// 인파 속에서 고아 하나가 물었다/ 저기 임금님 머리에 반짝이는 게 뭐예요?// 누군가 대답했다: 저게 뭔지 우린들 어찌 알겠니/ 다만 값비싼 물건인 건 분명하구나// 꼬부랑 노파가 가까이 가 보더니 말했다/ 이건 나의 눈물이자 자네들이 흘린 핏방울이야” (파르빈 에테서미 ‘고아의 눈물’ 중)
최 교수는 “국제 뉴스에서 비춰지는 이란의 모습은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이미지”라며 “이 시집을 통해 그들도 우리와 같은 눈물과 웃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걸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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