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꼭 스무살이 되던 해에 청년은 ‘거리의 힙합 전도사’를 꿈꿨다. 유명 힙합 DJ인 소울스케이프의 ‘창작과 비트 랩 경연’ 에서 2위를 차지한 뒤 확신을 얻었다. 안정적이면서도 리드미컬하게 랩을 이끌어나간다는 호평을 받은 그는 힙합 크루 지기펠라즈 멤버로 활동하며 랩 음악에 열정을 쏟았다. 축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 한 뒤 가장으로서의 생계 문제로 꿈에 발목을 잡혔다. 아이가 생기자 사내는 마이크를 내려놨다. 한 스포츠웨어 브랜드 스포츠마케팅팀에 취직해 회사원으로 지내며 꿈을 접었다. “내가 음악을 그만두면 모두가 행복할 것 같았다”는 게 사내의 속마음이었다. 이번엔 그의 아내가, 꿈을 포기하고 풀이 죽은 남편을 안타깝게 여겨 용기를 냈다. 남편을 응원하며 그의 Mnet ‘쇼미더머니4’지원에 힘을 실어줬고, 결국 남편은 28일 방송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주인공인 베이식(본명 이철주, 29)의 얘기다. 이처럼 사연 많고 가슴 찡한 ‘인간극장’이 펼쳐지는 곳이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어려웠던 현실을 딛고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거위의 꿈’을 이뤘던 이들을 돌아봤다.
▦ 허각, 환풍기 수리공에서 ‘공정사회’ 아이콘으로
“한강공원 망원지구에 있는 화장실 환풍기 다 제가 달았어요. 지나가다 보면 생각이 나죠.”환풍기 수리공이었던 허각은 134만 대 1의 경쟁을 뚫고 지난 2010년 Mnet ‘슈퍼스타K2’우승해 성공 신화를 썼다. 중학교를 중퇴한 허각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낮에는 건물 천장에 환풍기를 설치하는 일을 하고, 저녁엔 백화점 등을 돌아다니며 행사 무대에 서 돈을 벌었다. 가창력은 뛰어나단 소릴 들었지만 가수가 될 꿈은 제대로 꿔 보지도 못했다. 가수 기획사 오디션을 보면 외모 때문에 수 없이 퇴짜를 맞은 탓이다. ‘미운오리새끼’취급을 받던 허각은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 미국 유학파이자 ‘훈남’인 존박을 제치고 오디션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됐다. 이를 보고 2007년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서 우승한 폴 포츠를 떠올리는 시청자가 많았다. 뚱뚱한 외모에 어눌한 말투로 “오페라를 부르겠다”고 하자 노래 전 방청객의 코웃음을 샀던 휴대전화 외판원이 심금을 울리는 깊이 있는 목소리 하나로 세상의 시선을 사로 잡은 일이 허각과 닮아서다. 당시 허각은 ‘공정사회의 아이콘’이라 불리며, 그의 우승은 사회적인 화두가 되기도 했다.
▦ 최성봉, 껌팔이 소년의 승리
세 살에 고아원에 버려진 소년은 폭력에 시달리다 다섯 살 때 도망을 나왔다. 공중화장실에 잠을 자고, 길거리에서 껌팔이를 하며 밥을 해결했다. 이후엔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10년 동안 길거리 생활을 했던 소년의 꿈은 성악가였다. 나이트클럽에서 껌을 팔다 듣게 된 성악가의 노래가 계기가 됐다. 소년은 열 네 살이 되던 해 성악가가 되기 위해 야간학교에 들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배웠고, 검정고시를 통해 자격을 땄다. 이후 대전예술고 성악과에 입학한 그는 등록금과 레슨비를 벌기 위해 택배회사 물류창고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하는 악재를 또 겪었다. 이를 극복하고 2011년 tvN ‘코리아 갓 탤런트’에서 준우승한 그는 미국 CNN에서 ‘한국의 수잔 보일’이라고 주목하며 세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22년 동안 인생의 반 이상을 도망자처럼 그리고 하루살이처럼 살아왔던 아이가 이 짧은 시간에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아직 두렵다”는 게 최성봉의 말이었다. 그가 방송에서 부른 ‘넬라 판타지아’영상은 유튜브에서 최단 기간 조회 수 5,000만 건을 기록했고, 누적 조회 수는 1억 6,000만 건이 훌쩍 넘는다. 최성봉의 이런 성장 스토리는 미국 할리우드에도 관심을 보여 현재 영화 제작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영화 제작자 폴 메이슨 엘비스 프레슬리의 미망인 프리실라 프레슬리는 최성봉 측과 영화 드라마 판권 계약을 했다.
▦ 백청강 ‘옌볜 청년’의 이룬 ‘코리안 드림’
키 167cm에 ‘꽃미남’도 아니었다. 2011년 MBC ‘위대한 탄생’에서 우승한 백청강은 옌볜 청년이 이룬 ‘코리안 드림’으로 주목 받았다. 백청강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국으로 돈을 벌러 떠나 9세부터 혼자 지냈다. 야간업소를 전전하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옌볜TV 전국청소년 콩쿠르 오디션 1등, 제1회 청소년신인가요제 대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 받았다. 옌볜 투먼시 제5중학교를 나와 팝현대음악학원을 졸업한 백청강은 한국에서 가수가 되고 싶어했다. 부모와 할아버지 나라에서다. 그는 ‘위대한 탄생’본선을 위해 처음 한국땅을 밟고 국내 한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만났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기성 가수도 잘 부르지 못하는 이승철의 ‘희야’를 시원하게 쏟아냈던 백청강에 대한 시청자의 사랑은 뜨거웠고, 결국 그는 ‘위대한 탄생’의 역사가 됐다.
▦임윤택, 죽음의 문턱에서 쓴 기적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삶에 비극은 없다.”위암 투병 중에 그룹 울랄라세션의 Mnet ‘슈퍼스타K3’(2011)우승을 이끌었던 고 임윤택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승직후 몸 상태를 걱정하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합숙 생활을 할 때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나 아이들을 깨웠다”는 게 그였다. 임윤택은 ‘슈퍼스타K3’에 도전했을 때 위암4기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가수로서의 꿈을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올랐다. 위암 수술을 받고 며칠 지나지 않아 허리춤에 피주머니(수술 후 몸 속에 고여 있던 피를 받아내는 주머니)를 차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 전 61㎏이었던 그의 몸무게는 경연이 진행되며 10㎏ 가까이 줄었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음에도 마이크를 잡았다. 15년 동안 팀을 꾸리며 서른이 넘어서도 헛 꿈을 꾼다고 주위에서 손가락질 받았다는 임윤택.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무대에 대한 열정을 태워 기적을 썼다. 임윤택은 지난 2013년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잊지 않은 이유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