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미는 대법관 후보라…"
결격 사유없으면 의중대로 통과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 우려 목소리
박근혜 대통령이 2년 뒤 양승태 대법원장의 후임을 임명하면, 차기 정부는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대법원장 임명 기회가 없게 된다. 다음 정권에서도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는 요원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일반 법관은 물론, 대법관 인사까지 쥐락펴락하는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가 그런 우려의 큰 배경이다. 이달 초 열린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추천위) 심사과정이 그 실례를 보여준다.
대법원장 ‘의중 인사’부터 심사… 나머진 뒷전
이달 4일 오후 대법원에서 열린 추천위 회의. 내달 퇴임인 민일영 대법관 후임으로 누가 적임자인지 심사하려는 위원들 앞에 양 대법원장의 ‘의중’이 담긴 종이가 놓였다. 대법원장이 뽑고 싶어하는 법조인 3명의 명단을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이 전한 것이다.
내부 위원을 포함한 법조계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심사 대상자 26명 가운데 우선 순위는 대법원장이 제시한 고위 법관 2명과 변호사 1명, 이렇게 3명이었다. 한 위원은 “대법원장이 원하는 인사여서 이견을 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으면 통과됐다”고 했다. 고위 법관 2명은 그대로 통과됐고, 변호사 1명은 위원들의 재산 문제 지적으로 빠졌다.
이어 추천위는 대법원장이 임명제청할 대상의 3배수 이상을 추천해야 하므로, 1명을 추가하기 위해 심사대상 3, 4명만 더 들여다 봤다. 추천위의 다른 인사는 “국민과 단체로부터 ‘대법관이 될 만하다’는 의견과 추천을 받은 26명 중 20여명은 사실상 심사도 안 했다”면서 “국민을 기만한 절차”라고 강한 유감을 표했다. 대법원은 이번에 처음으로 천거된 인사들 중 심사에 동의한 인사들을 사전 공개하고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적 투명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추천위에서 20여명은 ‘들러리’ 역할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1명을 더 추천하는 과정에도 대법원장의 ‘뜻’은 고려됐다. 재야의 진보 성향 변호사에 대해 보수성향의 한 위원은 “진보라서 안 된다”고 반대했다. 김현웅 법무장관도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 이후 헌재를 비판했다”며 부적합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위원장인 김종인 건국대 석좌교수가 “대법원장님 의중에 어긋난다”고 토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결국 표결 처리하기로 됐고, 해당 변호사는 ‘8(반대) 대 2(찬성)’로 탈락했다.
추천위원도 과반 대법원장 임명… 뻔한 표결
이날 표결은 몇 차례 진행됐으나 대부분 ‘8 대 2’, 어쩌다 ‘7 대 3’으로 결론이 났다. 한 참석자는 “알고 보니 표결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워낙 뻔해서 그 동안 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고 전했다. 다른 위원은 “추천 논의는 잘 됐는데, 추천위 인적 구성이 대법원장 쪽이 더 많으니까 소수파의 얘기가 밀리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추천위의 위원 10명 중 6명은 결국 대법원장의 몫이다. 후임을 추천하고 물러나는 선임 대법관과 법원행정처장, 현직 고법판사는 법원의 ‘식구’이다. 대법원장은 이와 별도로 각계 전문가인 비법조인 3명을 위촉할 수 있다. 나머지 4명은 법무부 장관과 대한변호사협회장, 한국법학교수회장, 법학전문대학협의회 이사장이다. 추천위는 재적 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되니 대법원장 쪽의 6명만 같은 목소리를 내면 표결이 별 의미가 없다. 대법원장이 실질적으로 찍어둔 사람이 있고, 추천위는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말이 되풀이되는 이유다.
“대법원장, 추천자 제시 포기해야”
법원 안팎에선 “대법원장이 추천 대상자 명단을 제시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변협은 최근 성명에서 “법에도 없는 ‘대법원장의 심사대상자 제시 권한’을 규칙으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회가 ‘비법조인 3명’을 대법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재화 변호사는 “임명제청권이 있는 대법원장이 천거까지 하면 ‘내가 원하는 사람을 해 달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대법원은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헌법상 대법원장한테 임명제청권이 있는데, 그 제청권을 형식화하는 것이 헌법정신인가”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이는 사법부가 상고법원 설치를 추진하면서 내건 “대법원은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반영하는 정책법원이 되겠다”는 명분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대법원 구성의 실질적인 다양화의 전제가 되는 대법관 임명 절차 개선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때문이다. 진보 성향의 한 전직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6년간 자신과 성향이 맞는 신임 대법관 자리를 채우면 어느 순간부터 토론 자체가 안 된다”며 “사건 적체가 심해 상고법원 자체는 찬성하나, 대법원의 구성 다양화가 병행되지 않으면 대법원이 국민들에게는 되레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대법관 후보 제청 과정에서 대상자가 어떤 판결을 해 왔는지 아는 법관들이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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