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첫주 국내 첫 금서 읽기 주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고전부터
용공 낙인 '몽실 언니' 등
교사·작가·평론가 추천 목록 작성
미국도서관협회는 매년 9월의 마지막 주를 ‘금서 주간(Banned Books Week)’으로 운영한다. 전국의 공공도서관, 서점, 학교, 출판사가 참여해 금서를 읽고 토론하는 이 행사는 미국이 급격히 보수화로 기울기 시작한 1982년 시작됐다. “금서 읽기는 자유로 가는 티켓”이라는 표어가 보여주듯 독서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캠페인이다. 주로 마약, 섹스, 동성애, 종교 문제 등 미국 사회의 민감한 이슈가 걸려 고발을 당하거나 논란이 된 책들을 읽는다. 덕분에 도서관이나 학교, 서점에서 쫓겨날 뻔한 많은 양서가 구제됐다.
한국에서도 금서 읽기 주간이 처음으로 열린다. 독서ㆍ도서관ㆍ출판 관련 시민단체들이 모인 ‘바람직한 독서문화를 위한 시민연대’(이하 독서문화 시민연대)가 독서의 달, 9월의 첫 1주일(9월 1~7일)을 제 1회 ‘금서 읽기 주간’으로 선포했다. 역사상 금서였거나 최근 논란이 된 책을 읽고 토론하며 독서와 도서관의 자유를 생각해보자는 제안이다. 교사, 작가, 평론가 등 전문가들이 추천한 금서 목록을 작성 중이다. 전체 목록은 독서문화 시민연대에 참여하고 있는 책읽는사회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추천 금서 목록 바로가기)
이 목록은 24일 현재 46권이 모였다. 정치적 불온함이나 외설 시비와는 거리가 먼 고전과 명작이 다수 포함돼 있다. 예컨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살을 부추기는 위험한 책으로, 만화 ‘아기 공룡 둘리’는 아이들 버릇 나빠지게 하는 불량 만화로 찍혔던 이력이 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같은 고전도 한때 금서였다. 모리스 샌닥의 그림책 ‘괴물들이 사는 나라’,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처럼 전세계에서 사랑 받는 걸작도 아이들에게 해로운 책이라는 지탄을 받았고, 100만부 이상 팔린 권정생의 동화 ‘몽실 언니’는 용공 낙인이 찍혔던 책이다.
책 목록은 “금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격언을 환기시킨다. 유신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해 필화를 겪은 김지하의 ‘오적’,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 월북 시인으로 묶여 1987년에야 해금된 백석의 시집 등은 냉전과 독재가 금지했던 책이다. 군사정권은 출판되는 모든 책을 검열했고, 권력 비판이나 사회주의 관련 책은 갖고 있기만 해도 처벌했다.
지금도 금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출판을 막지는 않지만, 읽지 못하게 하려는 유ㆍ무형의 압력이 여전하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은 자주 불온하다는 눈총을 받고 툭하면 ‘종북’ 딱지가 붙는다. 2008년 국방부 불온도서 목록에 올라 더 유명해진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2012년 대법원은 국방부 조치가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이번 금서 읽기 행사도 최근 한 보수단체가 비전향 장기수의 회고록 ‘나는 공산주의자다’ 등을 좌편향 도서로 지목하며 학교도서관에서 몰아내라고 주장하자 문화체육관광부와 경기도교육청이 도서 추천의 투명성 강화 내지 재검토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낸 사건이 계기가 됐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금서의 역사는 오래 됐다. 로마 교황청이 20세기 중반까지 400년간 발행한 금서 목록은 서양 철학사를 알려면 이 목록을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등 주요 철학자와 사상가의 책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동양으로 오면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금오신화’ ‘홍길동전’ ‘열하일기’ 등이 금서였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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