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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길 위의 이야기] 언어라는 돌

입력
2015.08.2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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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초년생 때, 선배와 함께 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낮술 몇 잔의 취기로 얼결에 감행한 산행이었다. 가을이었지만, 등짝에 꽂히는 햇살은 제법 따갑고 쓰라렸다. 앞장 선 선배는 말없이 후끈해진 등짝만 들썩이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취기가 풀리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근처 바위에 나란히 앉아 숨을 골랐다.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울긋불긋해진 건너편 언덕의 나무들만 바라봤다. 차올랐던 숨이 가라앉으며 지난밤 쓰다만 시가 갑자기 되새겨졌다. 서둘러 완성하겠다는 생각이 호흡을 일그러뜨려 손대기 힘든 상태가 됐다는 하소연을 입산 전에 늘어놓은 상황이었는데, 산에 올라 숨을 내려놓고 있으니 목줄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밧줄 하나가 헐겁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문장들이 낙엽처럼 사뿐히 마음속에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선배가 갑자기 큰 돌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몇 걸음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내가 지금 지구를 옮겼다.” 석가의 연꽃을 본 가섭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 썰렁한 농담이 짐짓 통렬하게 뇌리를 쳤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게 마음속에 얹힌 돌 하나를 다른 데로 옮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억지로 쌓기보다 맺힌 자릴 비워내려는 노력. 돌이 옮겨간 자리에 붉은 낙엽 하나가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영혼의 슬로모션 같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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