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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워싱턴의 탐욕에 맞선 女상원의원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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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워싱턴의 탐욕에 맞선 女상원의원 분투기

입력
2015.08.2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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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잠룡 엘리자베스 워런 자서전

"숱하게 패배했지만 강해질 것, 변화는 힘들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엘리자베스 워런은 2012년 매사추세츠주 의원 선거에서 소방관 노조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워런은 “온 힘을 다해 돕겠다”는 노조 측의 선포에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이들은 약속대로 유세기간 내내 그녀를 응원하는 큰 노란 버스로 주 곳곳을 누볐다. 에쎄 제공
엘리자베스 워런은 2012년 매사추세츠주 의원 선거에서 소방관 노조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워런은 “온 힘을 다해 돕겠다”는 노조 측의 선포에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이들은 약속대로 유세기간 내내 그녀를 응원하는 큰 노란 버스로 주 곳곳을 누볐다. 에쎄 제공

명백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 뜻밖에 험난할 수 있다. 특정 이익집단의 세가 압도적이거나 게임의 규칙이 왜곡된 곳일수록 그렇다. 지당한 주장 하나를 관철시키는 데에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이 벌어지고, 기본적 권리를 찾으려는 한 인간을 투쟁가와 소시민의 갈림길로 내몬다.

엘리자베스 워런은 이 기로에서 지칠 줄 모르고 싸우는 쪽을 택해온 학자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고 행해왔다는 이유로 그는 어느새 전선의 맨 앞줄에 남았고 민주당의 미국 상원의원에 올라 가장 주목 받는 정치인, 올해의 인물, 미국 최고의 진보주의자, 유력 대권 후보로까지 떠올랐다.

싸울 기회 엘리자베스 워런 지음. 박산호 옮김. 에쎄 발행ㆍ548쪽ㆍ2만2,000원
싸울 기회 엘리자베스 워런 지음. 박산호 옮김. 에쎄 발행ㆍ548쪽ㆍ2만2,000원

그가 지난해 펴낸 자서전 ‘싸울 기회’가 국내 번역 출간됐다. 개천에서 난 용, 워킹맘, 학자, 정치인으로서 그가 풀어낸 기록은 신념을 사수하기 위해 끝내 정계진출에까지 이르게 된 한 개인의 회고록이자 월가와 워싱턴을 잠식한 부패의 실상에 대한 예리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기억은 “나는 내가 철든 날을 알고 있다”는 문장에서 시작한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정비사 아버지를 대신에 쉰 살의 나이에 최저임금 일자리를 찾아 나선 어머니의 면접을 배웅하던 날 12세 소녀는 어른이 됐다. 식당종업원, 보모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해 대학에 진학했고 결혼해 아이를 낳은 뒤, 파산법을 공부해 하버드대 법대 교수를 지내기까지의 지난한 일상을 담담하지만 세밀하게 그려낸다. 면접을 위해 장례식에서나 입던 낡은 원피스에 몸을 구겨 넣던 어머니의 움직임과 울기 직전의 표정까지.

늘 가난으로 고통 받았던 그는 평범한 사람 누구나 파산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95년 파산법 검토위원회, 2007년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의 감독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 것을 계기로 대형은행과 워싱턴 정가의 부패와 유착에 눈을 뜨게 된다.

그는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2008년 9월 세계 금융위기 강타로 미국 정부가 긴급 구제 자금을 투입하는 과정에서 허위보고를 통해 경제위기의 장본인인 대형은행들만을 집중 지원하는 TARP의 활동을 폭로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로비스트를 고용해 월가 포섭에 나선 대형은행들이 숱한 신경전으로 훼방을 놓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방만한 기업들보다 일반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자를 부담하게 설계된 대출을 통제, 감독, 규제할 소비자보호금융국을 출범시키는 역사를 썼다.

하버드대 교수로 돌아온 그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선거출마라는 전쟁에 뛰어든 것도 2012년 11월 매사추세츠주 의원 선거에서 ‘월가의 총아’로 통하던 공화당 후보 스콧 브라운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번번이 투기자본가들을 배 불리는데 희생당한 미 중산층은 당연히 워런에게 환호했다.

촘촘한 그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당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기득권의 행태에 치를 떠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모든 것을 바쳐 노력했는데도 남겨진 것은 실업과 살인적인 금리의 학자금 대출뿐인 청년의 사연에는 가슴이 저민다. 이 여정을 관통하는 안타까운 진실은 결국 거대은행 대신 시민에게 봉사하는 정부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 ‘단 한 사람의 신념과 행동’이었다는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워런. 에쎄 제공.
엘리자베스 워런. 에쎄 제공.

책이 남기는 유일한 아쉬움은 워런이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현대 정치경제사가 자주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의 문법을 거슬러온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끈질긴 분투로 골리앗의 횡포를 견제하기 시작한 그녀의 자서전은 차라리 픽션처럼 읽힌다. "과거에도 현재도 숱하게 패배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강해질 것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싶었다"는 워런의 고백이 그나마 위안으로 남는다.

“변화는 힘들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열정을 쏟는다. 어떻게 백전백승의 인생을 살 수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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