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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링컨 vs 거물 더글러스 '노예제 공개토론'

입력
2015.08.2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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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8월 27일 두 번째 논쟁이 벌어진 일리노이주 프리포트시의 링컨(왼쪽) - 더글러스 동상.
1858년 8월 27일 두 번째 논쟁이 벌어진 일리노이주 프리포트시의 링컨(왼쪽) - 더글러스 동상.

1858년 미국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전 하원의원 에이브러햄 링컨(공화)이 맞선 상대는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낸 거물 현역 스티븐 A. 더글러스였다. 링컨은 더글러스에게 개척지 노예제 문제를 두고 공개토론을 벌이자는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 대립으로 연방 존속이 불투명하던 때였다. 더글러스는 1850년 ‘미주리 타협’이라 불리는 연방법으로 이룬 위태로운 균형(북위 36도30분 미주리라인 위쪽은 자유주 아래는 노예주)을 54년 ‘캔자스 네브라스카 법안’으로 뒤흔든 장본인이었다. 서ㆍ남부 개척지 노예제 수용 여부를 백인 개척자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더글러스 법안은, 링컨과 공화당이 보기엔 ‘미주리 타협’을 무력화할 수 있는 법안이었다.

한 마디로 저 주제는 일개 주 상원 선거에서 신인이나 다를 바 없는 무명 정치인이 대선후보급 상대 주전과, 그것도 전국민 앞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기엔 너무 무겁고 위험한 국가적 의제였다. 미국 언론은 일리노이의 주요 도시를 돌며 모두 7차례 세 시간씩 진행된 둘의 토론을 거의 전문(全文)을 실어가며 보도했다. 첫 토론이 58년 8월 21일 오타와에서 열렸다.

물론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하지만 그의 반(反)노예제는 휴머니즘적 당위보다 연방 존속의 현실적 당위에 더 얽매인 신념이었다. ‘분열된 집(A Divided House)’ 연설이란 이름으로 유명해진 링컨의 첫 공격도 그러했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의 노예주, 절반의 자유주로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더글러스는 링컨이 노예제 폐지를 꾀함으로써 결국 연방의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고 반격했다. 토론은 무승부였고, 선거에서는 더글러스가 승리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승자는 링컨이었다. 그는 2년 뒤인 60년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됐고, 더글러스를 누르고 당선했고, 63년 1월 1일 남북전쟁(61년 발발) 중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했다.

링컨에게 노예는, 대선 전에도 취임 후에도 인간인 동시에 소유주의 ‘재산’이었고, 남북 분열의 골치 아픈 원인이었다. 그는 연방재정으로 각 주가 노예 주인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서 노예를 해방시킨 뒤 미국 밖으로 추방해 그들만의 나라(곧 식민지)를 건설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그의 극단적인 흑백 분리 구상은 남북전쟁으로 물거품이 됐고, 북부 연합이 승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다. 그는 전쟁 중 흑인들의 북군 참전을 마뜩찮아 하다가 뒤늦게 허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링컨은 유연했다. 상황이 달라진 뒤론 ‘흑인 추방-식민화’구상을 즉각 포기했다. 오히려 다인종국가 미국을 가장 앞장서 주장한 정치인이 그였고, 제한적이나마 흑인 투표권(교육받은 남북전쟁 기여자에 한해서지만)을 지지한 최초의 정치인도 그였다. 그가 노예해방의 아버지가 된 것은 굳건한 정치철학 덕이 아니라 유연한 정치감각 덕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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