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원초적으로 의심스런 과일이죠. 이브의 사과처럼 뭔가 줘서는 안 될 것을 준 느낌, 뭔가 받아먹어서는 안 될 것을 덥석 물은 느낌이 드는 열매입니다. 저는 의심 많은 사람이라서 슈퍼에 가서 껍질째 먹는 사과를 사고서도 꼭 깎아먹어요.
그런데 시인의 말을 듣다 보니 제가 단순하고 어리석었네요. 한때 중심이었던 것이 밀고 나와 껍질이 되었다면 껍질만 독인 것은 아닌데 껍질만 깎아내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에요. 껍질만 의심하면 나머지는 안심, 모든 죄는 껍질에게 물으련다. 이런 사과 껍질의 철학에서는 사회의 버젓한 일원들을 주변인으로 몰아세우는 논리가 떠오릅니다. 이주노동자만 없다면, 성소수자만 없다면, 나와는 다른 누군가만 없다면 우리 세계는 안전하고 질서정연하다는 믿음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겠어요. 오늘 아침에는 사과 한 알을 껍질째 먹으면서요.
진은영 시인ㆍ한국상담대학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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