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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내 '반동의 대명사' 트로츠키 암살에 쓰러지다

입력
2015.08.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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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가로서 또 혁명가로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사진)의 사상과 삶은 스탈린의 탄압과 스탈린 치하 소련의 억압적 체제 덕에 역설적으로 주목 받은 면이 있다. 트로츠키주의자인 아이작 도이치가 쓴 트로츠키 전기 3부작, 특히 3부 ‘추방된 예언자’에 소개된 그의 말년의 글들, 그리고 유언으로 알려진 40년 2월의 일기 “의식을 깨우친 이래 나는 43년의 생애를 혁명가로 살아왔다.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생은 아름답다.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기를…”같은 글들은, 인간적인 매력과 함께 기품 있는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한껏 드러냈다.

그는 1917년 10월 혁명의 주역이자 레닌의 동지였고, 잠깐 소비에트의 외무장관을 지냈다. 22년 레닌 사후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그는 조국에서 추방 당했고, 유럽 등지를 떠돌며 외롭게 반(反)스탈린 투쟁을 벌여야 했다. 고국에 남은 그의 가족과 측근들은 36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숙청에 대부분 희생됐고, 그 역시 피살 위험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 다녀야 했다. 그리고 75년 전 8월 20일 멕시코에서 독재자가 보낸(것으로 추정되는) 암살자의 등산용 피켓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숨진 뒤로도 오랫동안 그의 이름은 국제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반동’의 대명사였다.

스탈린을 숭앙했던 서유럽 대다수 사회주의자들은 흐루시초프 체제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본격화한 이후에야 그를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독일에 맞서 소련의 도움이 절실했던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권력자들도 2차대전이 끝난 뒤에야 그의 비극을, 그것도 공산체제의 잔혹함을 선전하는 도구로써 조심스럽게 활용했다. 그의 조국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볼세비키 대다수를 80년대 사후 복권시키면서도 트로츠키만은 제외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레닌 사후 트로츠키가 권력을 장악했다면 소련의 국가사회주의는 사뭇 달랐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들은 트로츠키가 30년대 파시즘에 맞서 국제 사회주의의 공동전선을 제안했고, 극단적인 탄압 속에서도 스탈린주의에 맞섬으로써 “세계 변혁과 미래를 위한 투쟁의 도구”로서의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전통을 지켜낸 거인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옥스퍼드대 러시아 혁명사가인 로버트 서비스는 전기 ‘트로츠키’에서 “트로츠키는 의도나 실천에서 스탈린과 가까웠다”고,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이 그에 대한 칭송의 말을 기록할 때, 그들은 트로츠키가 언급한 일반적인 목적들을 마치 그가 실제로 실행에 옮긴 행동이었던 것으로 착각했다”고 썼다. 1923년 볼세비키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한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혁명의 이름으로 테러를 정당화한 것도, 노동조합을 국가에 종속시키려 한 것도 트로츠키였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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