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 상담원·보육교사 등
극단적 스트레스 고위험군 대상
서울문화재단 프로그램 시작
동료들과 그룹 중심 참여 유도
친밀감 높여 심리적 안정에 효과
“열차가 탈선하거나 지각해서 열차를 운행하지 못하는 꿈을 수시로 꿔요. 깨고 나면 하루 종일 꿈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
17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마장역의 한 교육실. 25명의 남성들이 드럼 스틱, 핑거 쉐이커 등의 악기를 들고 바닥에 빙 둘러앉아 있다. 남성들 가운데에 앉은 한 여성 강사가 농담을 섞어 가며 힘겹게 흥을 돋우지만 이들의 손 놀림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그저 강사가 요구하는 대로 무표정하게 기계적으로만 움직일 뿐이다.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이들의 굳은 표정은 교육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광석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따라 드럼 스틱으로 박자를 맞추고, 동료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율동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환한 웃음을 쏟아냈다.
이들은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특수직 종사자 대상 ‘음악으로 달리는 기차, 춤추는 마음’ 교육을 받고 있는 서울시 도시철도공사 5호선 기관사들이다. 이날 교육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예술치유 프로그램이다.
서울문화재단은 이날부터 26일까지 지하철 기관사 350여명 등을 대상으로 특수한 직업이나 어려운 환경에서 얻게 되는 각종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심리적 안정을 돕기 위한 예술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임은영 음악치료사는 “매일 분 단위로 움직이는 지하철의 좁은 기관실에서 홀로 근무하는 기관사들은 하루 종일 긴장감과 압박감의 연속일 것”이라며 “동료들과 함께하는 그룹 중심의 참여를 통해 상호교류뿐만 아니라 친밀감도 높여 긴장감을 풀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하철 기관사 상당수는 사고 위험에 대한 긴장감과 가끔 기관차에 뛰어드는 자살자들을 본 충격으로 인해 각종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날 치유프로그램에 참가한 22년 경력의 베테랑 기관사 이병홍(51)씨도 이런 경험을 털어놨다. “나처럼 자살 사고를 경험해본 기관사라면 운행 동안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가 없어요. 사람이 집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한계가 있는데 그 시간을 넘기면서 몇 시간씩 지하철을 혼자 몰다 보면 극도의 긴장감에 졸음도 오는데 그 모든 것을 혼자 삭혀야 하니 그게 다 스트레스가 되는 거죠.” 그런데도 자신의 상태를 알릴 곳을 찾지 못하거나 제대로 풀지 못한 일부 동료들이 홀로 괴로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어두운 지하 공간의 좁은 기관실에서 수천명의 승객을 태운 채 혼자 3,4시간씩 운행을 하는 과정에서 기관사들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 서울시가 한림대학교에 의뢰해 2012년 서울도시철도공사 직원 4,07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운전직군은 모든 영역에서 직무 스트레스가 높게 나타나 ‘스트레스 고위험군’으로 분류됐다. 특히 이 조사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일명 트라우마)’와 관련해 외상 경험이 있는 사람은 338명(8.3%)으로 나타났고 이들 중에서 PTSD 증상자는 164명(48.5%)으로 나타났다.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의 연구결과에는 PTSD로 인한 지하철 기관사의 ‘1년 유병률’은 일반 인구 집단의 8배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씨는 “과거에는 사망사고를 겪은 기관사에게 3일간의 위로휴가를 주는 게 전부였는데 그래도 지금은 여러 치유 프로그램이 생겨났다”면서 “예술치유 프로그램처럼 업무적인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문화재단은 9월부터는 상담 도중 욕설과 성희롱 등에 시달리는 콜센터 상담원과 어린이집 보육교사 등을 상대로 미술치료와 드라마치유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김기중기자 k2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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