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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자존감, 아이들에 보여 주고 싶었다"

입력
2015.08.1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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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권력에 저항조차 못하는, 그런 패배감 물려주기 싫어

흥행 잘됐으니 속편도 만들것… 관객과 사회문제 몰입해 보고 싶다

그간 흥행과는 거리가 있었던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의 1,000만 관객 고지를 앞두고 “흥행이 잘 돼 속편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그간 흥행과는 거리가 있었던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의 1,000만 관객 고지를 앞두고 “흥행이 잘 돼 속편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답변이 길었다. 1시간 동안 던진 질문은 겨우 다섯 개 정도. 그는 예정된 질문의 답까지 앞질러 말했다. 묻지 않아도 답이 나오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부조리한 한국사회, 특히 재벌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류승완 감독의 최신작 ‘베테랑’은 선과 악의 구분이 뚜렷하고 이야기 전개가 명쾌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다단해 보였다. 그래도 세상을 보는 그의 눈은 정연했고 말은 논리를 잃지 않았다. 현장에서 몸으로 배우며 세상에 대한 지식을 쌓아 온 영화인다웠다(영화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은 그를 ‘스트리트 스마트’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암살’과 함께 여름 극장가를 이끌고 있는 ‘베테랑’의 류 감독을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베테랑’은 16일까지 664만2,944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모았다. 5일 개봉한 영화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속도가 빠르다. 1,000만 관객 도달은 이미 예약했다. 저예산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로 데뷔해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짝패’(2006), ‘부당거래’(2011) 등을 거치며 두터운 팬층을 형성했던 류 감독이지만 그동안 대형 흥행과는 인연이 없었다. 관객의 선택을 가장 많이 받은 그의 영화는 ‘베를린’(2013)으로 716만6,290명이 찾았다. 류 감독은 ‘베테랑’의 흥행몰이에 대해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과 전화통화를 했다.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더니 봉 감독이 그 기분 알겠다고 했다. ‘괴물’의 개봉일 관객 수가 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전체 관객 수를 넘어섰을 때 기분이 묘했다고 그가 말했다. 관객이 많이 보니 좋기는 하지만 무섭기도 하다. 숫자놀음에 휘말릴까 경계하고 있다.

‘베테랑’은 다소 역설적인 영화다. 전작 ‘베를린’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류 감독의 의도야 어떠했든 ‘베를린’은 작심하고 1,000만 관객을 겨냥해 만들어진 영화다. 하정우와 전지현 한석규 류승범 등으로 꾸려진 배우 진용부터 남달랐다. 제작비도 108억원이 들었다. 700만명 언저리에 그친 흥행 성적이 그리 빛을 보지 못한 이유다. ‘베테랑’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만들어졌다. 제작비는 59억원. 투자배급사 CJ E&M 영화사업부문 관계자는 처음엔 당황했다. 유명 감독이 전작보다 영화의 몸집을 키워도 줄이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큰 영화를 하며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웠다. 영화를 만들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되찾고 싶었다. ‘베를린’을 하며 몸무게는 빠졌는데 정신적인 군살은 많이 늘었다. 그 군살을 털어내며 가볍고 호쾌하고 명쾌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었다.”

‘베테랑’은 극악한 재벌3세와 한 형사의 대결을 그린다.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가 하청업체의 한 화물기사를 죽음 직전으로까지 몰아간 뒤 금권을 이용해 이를 은폐하려 하고, 정의감 어린 우직한 형사 서도철(황정민)은 조태오의 죄상을 밝히려 한다. 도철이 태오의 손에 수갑을 채우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이 통렬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다. 영화의 흥행요인이다. 류 감독은 “영화를 준비하면서 재벌을 보는 눈이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재벌이 왜 떡볶이집까지 하냐는 의문이 들었는데 이제는 재벌의 그런 사고 체계를 이해할 만하다”고 했다.

“조태오는 상식으로 따지면 괴물 같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죄의식을 느낄 수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재벌 1세대는 그래도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세계에서 살았다. 하지만 3세대는 완전 다른 세계에 산다. 사회에서 재벌 개혁과 비정규직 목소리가 나와도 문제의 본질을 느끼지 못할 확률이 높다. 조태오가 화물기사 아이에게 장난감을 주거나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환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은 자신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는 “‘베테랑’을 자신의 아이와 조카들이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염치고 뭐고 없고 돈만 벌면 된다는 풍조가 깃든 사회를 보며 사람의 자존감이 돈보다 못한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강수연 누나가 어느 술자리에서 한 말이 내 가슴에 깊이 박혀 대사로 활용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위신)가 없냐?’ 내가 절대빈곤자 생활을 할 때도 식구들이랑 밥 먹으며 웃을 일이 많았다. 돈이 없다고 패배자는 아니다. 그냥 불편한 뿐이다. 그런데 요즘 사회는 돈 없는 걸 죄로 만든다. 돈 많은 사람에겐 저항조차 못한다. 우리 애들에게 그런 패배감을 물려주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야 해봐, (재벌이나 권력과) 붙어도 안 죽어’ ‘이기긴 힘들어도 괴롭힐 수는 있어’ 이런 메시지를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해주고 싶었다.”

‘베테랑’은 거친 액션이 스크린을 채우나 죽어나가는 등장인물은 한 명도 없다. 류 감독 장편영화 중 유일하게 살인이 빠졌다. “청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그러면서도 류 감독은 “예전에 박찬욱 김지운 감독과 모여 허진호 감독은 사람을 죽이지도 않고 어떻게 두 시간짜리 영화를 만드냐고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며 “이제는 사람 목숨을 예전처럼 함부로 다루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베테랑’을 연출하며 “영화 만들기에 대한 생각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대중영화 감독은 좋은 선생님과 같다. 좋은 선생님은 어려운 문제라도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쉽게 설명해준다. 사회 현안에 대해 해법까지 제시할 실력은 못 되지만 관객이 즐겁게 사회 문제에 몰입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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