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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나치… 히틀러의 수족… 루돌프 헤스의 죽음 등 아직도 미스터리

입력
2015.08.1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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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헤스(Rudolf Hess, 1894~1987ㆍ사진)가 히틀러를 처음 만난 건 1923년 11월 8일, 우익 유력인사들의 모임이 열린 뮌헨의 한 호프집에서였다. 그날 밤, 창당 4년 된 군소정당 나치(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선전부 책임자 히틀러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돌격대(SA) 600여 명을 이끌고 호프집을 점거, 참석자들에게 바이마르공화국 전복 혁명에 협력할 것을 요구한다. 극우단체 ‘툴레 결사’의 열성 멤버였던 청년 헤스는 그날 히틀러의 카리스마에 홀딱 반했다고 한다. ‘뮌헨폭동’이라 불리는 이어진 쿠데타로 히틀러는 5년형(8개월 복역)을 선고 받는데, 도주에 성공한 헤스가 히틀러의 옥중 수발을 들기 위해 자수(18개월형)해 옆 감방에서 ‘나의 투쟁(Mein Kampf)’집필을 도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나치 집권 후 헤스의 직위는 제3제국 부총통. 당(과 제국)의 공식적인 2인자였다. 하지만 그는 실권을 쥔 정책 참모가 아니라 총통의 수족, 즉 비서 같은 존재였다. 나치 핵심 권력자들과 달리 그는 점잖고 신사적이었고, 물욕ㆍ권력욕이 없었고, 심지어 친분이 있던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히틀러에게 애원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너서클 내에서 그의 별명이 ‘헤스 부인’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가 히틀러의 연인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지위에 비해 그의 역할과 존재감은 확실히 미미했다.

2차 대전 발발 초기, 영국의 대독 선전포고를 히틀러는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나의 투쟁’에 썼듯, 히틀러는 영국과 독일이 연합해 유럽을 지배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헤스의 소신이기도 했다.

1차대전 공군 조종사였던 헤스가 41년 5월 10일, 혼자 전투기 메서슈미트를 몰고 도버 해협을 건넌 건 켄트 공작 등 영국 친나치 왕족을 통해 영국 전시 내각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비행기는 격추됐고, 비상 탈출한 그는 전쟁포로로 억류됐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93세 되던 87년 오늘(8월 17일) 슈판다우 감옥에서 자살했다.

납득하기 힘든 영국행, 정신 이상설, 근 20년 간 가족 면회 거부, 타살 의혹 등 그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온갖 미스터리와 음모론을 낳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최후의 나치’로 그를 우상화하면서도 ‘나치의 최후’는 믿지 않았다. 유럽의 네오나치들이 헤스의 기일이면 떼로 몰려와 경찰과 대치하는 등 말썽을 빚었고, 바이에른 주정부는 2011년 7월 그의 묘를 파헤쳐 유해를 화장해 인근 호수에 뿌렸다. 나치의 기괴한 전설이 또 그렇게 추가됐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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