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14일 아베 담화가 발표되었다. 이전 총리들의 담화에 기대어 아베 총리는 전쟁으로 일본이 세계와 주변 국가에게 끼친 정신적, 물리적 피해에 대해 일본이 이를 깊이 새기고 후세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원론적 언급의 이면에 내재하는 각종 애매함과 모호성은 그의 진정성을 흐리게 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전쟁과 식민주의의 차별화다. 아베 담화에 식민지 문제는 서구 팽창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언급한 부분과 일본이 앞으로 식민지 정책을 포기하겠다는 부분이다. 어디에도 한반도 식민지에 대한 언급은 고사하고 식민통치로 인한 고통과 착취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전쟁 속에서 언급될 뿐 식민통치와 연관되어 있지 않다. 이는 한반도가 형식적인 법 논리상 일본의 일부였다는 이유 이외에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서구에 대한 대응의 일환이었다는 아베의 역사 인식에 기인하고 있다.
아베 담화가 무라야마 등 이전 총리들의 담화에 비해 역사 조망의 폭을 넓혀 19세기와 러일 전쟁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의 연원을 밝히는 데 있기 보다 일본이 아시아 국가로서 서구에 대항했다는 점과 일본의 국제정치 역사가 항상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는 러일 전쟁이 식민통치에 신음하는 아시아ㆍ아프리카 지역에 자극제가 되었다는 아베 총리의 인식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아베 담화의 또 다른 특징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 아시아의 차별화다. 2차대전으로 인한 미국 등 서구의 희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동시에 전후 일본에 대한 지원에 감사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과거에 대한 반성 못지 않게 일본은 미래의 국제사회에 기여할 것이며 이를 위해 미국 등 서구와 협조하겠다는 등 미래지향적 방향을 크게 부각 시키고 있다. 이는 과거에 집착하는 한국 등 아시아와 아시아의 고통에 대해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서구를 대비시켜 국제적 여론을 일본에게 유리하게 몰아 가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아베 담화의 일본 국내적 메시지는 희생의 균형화다. 일본이 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에 끼친 고통 못지 않게 일본 국민의 희생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일본이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딛고 일어섰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전쟁에 대한 원죄 의식의 종식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일본 지도자들의 잘못된 정책과 일본 국민을 오도한 책임은 언급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아베 담화는 대외적으로는 아시아를 떠나 미국과 서구에 구애를 표시하고, 대내적으로는 일본인들의 자긍심 부활을 목표로 한 것이다. 과거사는 이를 위한 이용물에 불과했다. 일본의 전형적인 ‘혼네’(속내)와 ‘다테마에(겉마음)라고 볼 수 있다. 아베 총리의 이런 전략은 국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지 몰라도 국내 및 아시아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끊임 없는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더 이상 사과는 없다는 아베 선언과 지속되는 일본 내 우경화 경향은 정권을 떠나 한국과 중국 및 아시아 각국 사회의 민족적 감정을 지속적으로 자극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는 아베 담화 이후 일본 내에서 변화는커녕 더욱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단기적으로는 불리한 국제 여론에, 중장기적으로는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의 자극과 이에 대한 국내적 대응이라는 복잡한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은 미국과 밀착된 협력 관계를 통해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한국을 우회하는 전략을 전개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해외 선전 활동 등 전방위 작업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역사 문제 해결과 현실 국제정치 문제를 분리해서 대응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국제정치 게임을 하면서도 역사 문제는 이와 별도로 다양한 전략과 채널을 통해 지속해야 한다. 특히 일본 정부를 상대하는 단편적인 대응에서 벗어나 일본 사회에 대한 전략을 다양화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잭슨스쿨 한국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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