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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하의 생활" 위안부 참혹한 기억 국내서 첫 공개 증언

입력
2015.08.13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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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운동가 김학순(1924~1997ㆍ사진)이 1991년 오늘(8월 14일), 자신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경험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기자회견으로 세상에 알렸다. 국내 거주자로는 첫 공개 증언이었다.

“(일본군은 위안부 동원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일본 정부의 90년 6월 발표가) 신문에 나오고 뉴스에 나오는 거 보고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이거는 바로 잡아야 한다 말이야.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참혹한 기억은 ‘단단한 결심’의 김학순도 여러 번 머뭇거리게 했다. “…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그의 공개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내ㆍ국제 사회의 여론이 비로소 폭발했고, 관련 연구와 시민운동이 심화 확산됐다. 추가 증언도 잇따랐다. 김학순 등 피해 여성 3명은 그 해 12월 도쿄지방법원에 일본 정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도 냈다.(이후 두 건이 추가됐다.) 세계 최장기 정기집회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일본대사관 앞 ‘수요 집회’가 처음 열린 것도 직후인 92년 1월 8일이었다.

김학순은 독립운동 하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를 떠돌다 아버지가 숨진 뒤 어머니와 귀국한다. 16살이던 40년 재혼한 어머니의 남편에게 이끌려 평양 권번에 들었고, 이듬해 일본군 위안부로 팔렸다고 한다. “인간 이하의 생활이었어요. 생각을 안 해야지…, 입술을 깨물고, 도망가려다 끌려오고….”(91년 인터뷰)

넉 달 뒤 한 조선 상인의 도움으로 그는 탈출하지만, 귀국 후 삶도 쓰라렸다. 6.25 전쟁으로 남편 잃고, 사고로 아들도 잃고. 품도 팔고 행상도 하면서 늘 생활고에 허덕였다. 잊고 싶은, 잊지 않는 넉 달의 기억과도 싸워야 했을 것이다. 소송도 모두 패소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의 식민지 피해 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소됐다”는 게 일본 법원의 판단이었다.

서울 월계동 영구임대아파트에 살며 노환에 시달리던 김학순은 전 재산 2,000여 만원을 다니던 교회에 이웃돕기 성금으로 기부하고 73세이던 97년 12월 16일 별세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아내라는 게 그의 유언이었다. 2012년 정대협 주최로 타이베이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는 매년 이날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정했다.

최초의 위안부 피해 증언자는 일본 오키나와에 살던 배봉기(1914~1991)였다. 전후 고향 충남 예산으로 차마 돌아갈 수 없어 잔류했다는 그는 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귀속된 뒤 불법체류자로 강제퇴거 당하지 않기 위해 피해 사실을 밝혔고, 현지 여러 언론에 보도됐다. 그의 사연을 엮은 빨간 기와집(가와다 후미코 지음)이 87년 일본에서 출간됐고, 92년과 2014년(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한국에 번역 출간됐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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