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죄 짓고 살지 말라 그랬지?”지난 5일 개봉한 영화 ‘배테랑’ 속 강력계 형사 서도철(황정민)은 트럭 운전사 사망 사건 용의자로 신진그룹 회장 막내 아들인 조태오(유아인)를 지목하며 수사망을 좁혀온다. 서도철은“나한테 이러고도 뒷감당 할 수 있겠냐”라는 재벌3세의 협박과 측근의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의 악행을 파헤친다. 안하무인 재벌3세와 그에 대해 죽자고 덤벼드는 형사의 도심 한 복판 격투 장면이 짜릿한 이 영화는 개봉 6일 만에 300만 관객을 불러 모았다.
#2. KL그룹의 아들은 연예인 지망생에 성접대를 강요했다. 약을 탄 술을 마시게 하려고 옥식각신하다 연예인 지망생이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숨졌다. 결국 KL그룹의 회장은 이 사건을 자살 사건으로 위장하려고 경찰에 손을 쓰지만, 경찰이 타살임을 홀로 밝혀 분위기가 반전된다. 재벌의 음모에 맞서는 여경 김희애의 고군 분투를 그린 SBS 드라마 ‘미세스캅’ 얘기다. 이 드라마는 10일 MBC ‘화정’을 제치고 월화극 시청률 정상에 올랐다.
대중문화가 ‘재벌 난타’에 빠졌다. 일부 재벌들의 ‘갑질’과 이를 응징하는 소시민의 얘기를 다룬 작품이 스크린과 안방극장에 연이어 나오며 관객과 시청자를 사로 잡고 있다. 재벌은 대중문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였지만 최근 들어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다. 3~4년 동안 드라마 ‘상류사회’나 영화 ‘돈의 맛’처럼 재벌의 화려한 삶이나 드라마 ‘황금의 제국’ ‘마이더스’처럼 그들만의 권력 다툼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재벌을 ‘공공의 적’으로 내세운 뒤 이를 응징해가는 소시민의 얘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런 변화는 ‘땅콩회항 부사장’과 ‘신문지 회장’ 등 재벌들의 ‘갑질’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더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현실에서 벌어진 황당한 재벌들의 ‘갑질’을 실감나게 다뤄 공감을 키운 덕분이다. 1인 시위를 하는 트럭 운전사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폭행하고 돈을 준 ‘베테랑’ 속 조태오는 현실 속 ‘맷값 폭행 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한 재벌가 자제와 묘하게 닮았다. ‘베테랑’을 본 직장인 박민희(40)씨는 “영화를 보면 시민이 재벌3세의 폭행을 휴대전화로 찍으며 다같이 지켜보는 장면이 있는데, 모두 쉬쉬하는 재벌가 자제들의 일탈을 일반인들이 함께 지켜보며 공분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통쾌했다”고 말했다. ‘베테랑’을 연출한 류승완 감독은 조태오란 캐릭터에 대해 “현실의 영향이 없다면 거짓”이라며 “조태오라는 개인보다는 조태오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재벌가의 자제를 과보호하는 시스템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었다는 문제 의식을 주고 싶었다는 얘기다.
최근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을 지켜보며 재벌가에 대한 불신이 커진 점도 영화와 드라마의 인기에 한 몫을 했다. ‘여대생 공기총 청부 살해 사건’의 주모자인 한 중견기업 회장의 아내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도 수감생활을 피해 온 일을 비롯해 ‘라면 상무’등 소위 상류층의 ‘갑질 사건’이 최근 1~2년 새 봇물처럼 터지며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산 게 두 작품의 폭발력을 키웠다는 분석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상류층의 연이은 갑질 논란에 소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고,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안이 콘텐츠를 통해 자연스럽게 옮겨졌다”며 “’베테랑’과 ‘미세스캅’에 대한 인기는 일탈한 재벌가 응징이란 소재를 통한 일종의 대리만족”이란 의견을 냈다. ‘베테랑’과 ‘미세스캅’에서 비상식적인 재벌가 자제를 응징하는 인물이 모두 경찰이라는 점은 재벌 앞에 유명무실해진 공권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자화상이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일부 재벌가의 일탈을 공정하게 처벌해야 하는 게 바로 공권력인데 이에 대한 작용이 제대로 안 되는 게 현실”이라며 “이런 현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재벌가의 일탈을 바로 잡는 상대가 경찰이란 공권력으로 그려졌고, 이런 변화는 사적인 응징을 주로 그렸던 옛 재벌 관련 드라마 혹은 영화와 다른 점”이라고 의미를 뒀다.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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