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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대 있는 명가도 풍비박산… 아래기로 배 채우며 버텼다

입력
2015.08.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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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등 천석꾼들 독립운동 투신

일제 압박에 집안 궁핍 시달려

자손들 고아원 가고 막노동까지

“‘아래기’라고 들어 보셨소? 소싯적 아래기로 주린 배를 안 채워본 아가 없다 아입니까.”

10일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생가인 경북 안동 임청각에 모인 60,70대 촌로 여섯은 배곯던 유년 시절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아래기는 소주를 곤 뒤에 남은 찌꺼기 ‘아랑’을 뜻하는 경상도 방언. 소주 지게미로 연명했던 지난 세월을 곱씹는 이들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다. 안동은 동쪽의 내앞부터 북쪽의 하계와 원촌, 서쪽의 금계와 가일, 오미 마을까지 항일 독립운동가의 산실로 유명한 도시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353명은 시 단위 지방자치단체 중 단연 으뜸이다. 서훈을 받지 못한 무명의 투사까지 합하면 대략 1,000여명의 주민이 일제 때 직ㆍ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산한다. 그 중 독립유공자 후손 67명은 지금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자긍심 하나로 버텨왔다는 이들이지만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에는 고단함의 울림이 더 크게 배어 나왔다.

고아원 전전하고 간장 행상에 급사 노릇까지

“중학교 졸업하고 여동생하고 대구 고아원에 들어갔제. 그래야 밥이라도 얻어먹고 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으니까.” 석주의 증손 이항증(76)씨의 기억 필름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1932년 석주가 만주에서 숨지고 가족이 다시 안동으로 돌아온 무렵부터 시작됐다. 어렵사리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강성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딱지가 붙으면서 일제의 핍박은 도를 더했다. 이씨는 “일제의 등쌀에 가족 모두가 세상을 등지고 여기(임청각)서 20~30리(8~12km) 떨어진 산 속에 들어가 10년을 살았다”며 “그랬는데도 괴롭힘에 지쳐 결국 가족이 풍비박산 났다”고 했다.

안동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던 석주 집안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망하자 가산을 모두 처분해 만주로 향했다. 석주는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를 결성하고 직접 이끌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까지 지냈다. 석주의 아들(준형)과 손자(병화)까지 3대는 물론, 종친 9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됐을 정도다. 그러나 일제의 변절 강요가 이어지자 할아버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42년 자결했다. 아버지까지 6ㆍ25 전쟁 와중에 숨지고 형님 4명도 잇따라 사망하면서 살림은 더욱 궁핍해졌으나 기구한 운명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이씨는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조카 9명까지 거두며 한평생을 눈물 속에 살다 가셨다”며 “내가 곡절 끝에 스물 일곱살에 은행에 들어갔는데 그게 우리 집안에서 처음 월급쟁이가 나온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대곡마을 대지주 출신으로 역시 1912년 만주로 망명했던 독립운동가 추산 권기일(1886~1920) 선생의 손자 대용(67)씨도 이씨와 진배없는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추산은 한일 강제병합 뒤 쌀 1,500석이며 논마지기와 기와집 등 전 재산을 팔아 군자금에 보탰지만, 1920년 민간인을 상대로 한 일본군의 대규모 보복전 당시 피살돼 만주 땅에 잠들었다.

광복과 함께 금의환향을 꿈꿨던 아버지의 기대는 금세 산산조각 났다. 아버지는 간장 행상으로 식구들을 보살폈다. 권씨는 “오죽하면 당시 독립투사 아들이 간장 행상을 한다고 신문에 났겠느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맏이인 권씨 역시 남의 집 허드렛일부터 시청 급사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절망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된 건 택시였다. 어렵사리 개인 택시 면허를 취득해 30년 넘게 바지런히 살며 3남매의 대학공부 뒷바라지까지 마칠 수 있었다. 권씨는 “얼마 전 어느 정부기관에 갔더니 ‘독립운동을 아저씨가 한 게 아니고, 아저씨 할배가 한 거 아닌교’라는 핀잔을 들었다”며 “‘지난 삶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독립유공자 후손이 부끄러운 훈장은 아니지 않느냐”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이념에 갇힌 후손들의 굴곡진 흔적

두 사람과의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던 중절모를 쓴 노인이 망설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이씨와 친구처럼 지낸다는 안우환(77)씨였다. 안씨는 이내 가족사를 쏟아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남흥에서 천석꾼으로 유명했다. 그랬던 집안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건 아버지 안상길 (1892~1958) 선생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다. 아버지는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경북 교통부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임시정부 자금을 마련하고 3차 조선공산당 경북도 책임비서까지 지내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안씨의 인생은 아버지의 독립운동보다 사회주의 활동이 부각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그는 “연좌제에 걸려 검찰 사무직 채용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발령이 안나 임용포기 각서를 썼다”며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뿐이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 이력이 버젓이 남아 있지만 국가보훈처는 유공자 지정 문의에 묵묵부답이다.

안씨의 8촌인 안선열(71)씨도 아버지 안상윤(1911~1949) 선생이 신간회 활동에 힘썼으나 사회주의 노선을 택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정이 거부됐다.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이력은 멍에나 다름 없었고, 나 역시 취업이 안 돼 장사란 장사는 다 해봤다”며 “이제라도 아버지에 대한 공적이 제대로 평가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힘들게 살아 온 삶의 궤적은 비슷해도 사회주의 노선에 섰던 후손들의 목소리는 분명 결이 달랐다. 풍산에서 만난 이헌붕(72)씨의 조부는 2차 조선공산당 중앙간부을 지낸 이준태(1892~?) 선생이다. 이씨의 집 한 켠에는 할아버지의 공적을 기록해 놓은 사진과 문서가 수북했다. 같은 시기 조선공산당 활동을 했던 김재봉 권오설 선생 등이 서훈을 받은 것과 달리 이씨의 할아버지는 ‘월북’ 증언이 두 번 나와 보훈처 심사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이씨는 “6ㆍ25 전쟁 이후 할아버지는 생사 불명이었는데 명확한 물증 없이 증언만 갖고 몰아 세우니 답답하다”고 억울해 했다.

독립운동가 손영학 선생의 손자 병선(63)씨의 말에는 좌우를 떠나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친 선대를 둔 후손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안동이 독립유공자가 많다카지만 대문에 독립운동가 집안이라카는 문패 하나 붙일라 해도 무신 절차가 그리 복잡헌지. 건의 자체가 안 된다 안캅니까. 뭔 날만 되면 떠들게 아니라 평시도 신경을 쪼매만 더 써달라카는 깁니다.”

안동=김성환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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