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뒤 공표될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에 담길 내용을 놓고 이러 저러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연초부터 시작된 이 추측 게임은 “반성이란 단어가 들어갈 가능성이 높지만 사죄는 빠질 것이다”는 진술이 나오면 다음날 “반성도 사죄도 들어가지만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을 것이다” 는 분석에 이어 “침략 전쟁은 반성하지만 식민지배는 그럴 수 없다”는 식으로 무한 반복된다. 이젠 그런 기사를 읽어야 하는 독자는 물론 그런 뉴스를 생산해야 하는 기자마저 지칠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 총리가 돌연 대오각성해 1995년 무라야마 도이치(村山富市) 전 총리의 표현을 뛰어넘는 사죄를 담화에 담는다고 한들 이를 진정한 사죄로 받아드릴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사죄는 말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뿐 아니라 행동을 통해 속죄하는 모습을 보여야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고 그 다음에 화해가 이뤄질 수 있어 그 기간은 길고 까다로울 수 밖에 없다. 특히 개인적 잘못이 아니라 국가 그것도 당대가 아니라 과거 조상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사죄한다는 건 훨씬 복잡한 일이다.
일본 경제가 잘나가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주변국이 요구하는 과거사 사과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내놓는 주된 반응은 “몰랐다,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걸 왜 내가 사과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논리에 대한 대응은 다소간의 인내력이 필요하지만, 설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독일은 2차 대전 이후 나치정권의 잘못에 대해 희생자와 주변국에 진정으로 사과했고 그 진심이 받아들여져 이제 당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소극적 사죄에 그쳐 국제사회에서 경제규모에 걸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사과하는 게 결국 일본에 이익’이라는 논리를 제시하면 어느 정도 공감대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불황이 끝없이 이어지자 숨어있던 일본 내 국수주의가 노골화했고 그런 움직임에 힘입어 집권한 아베 총리의 과거사 대응은 이전과 질적으로 다르다. 한마디로 역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멋대로 ‘왜곡’하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올 4월 30일 독일을 방문한 자리에서 왜곡된 역사관을 주저 없이 피력했다. 독일 신문과 인터뷰에서 ‘전후 역사문제 처리에 독일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는 질문이 나오자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답한 것. 그는 “유럽에선 독일의 헌신 이외에도 유럽 통합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위한 열망이 있었다”며 “아시아는 상황이 달라서 일본이 전후 독일 방식의 화해와 사죄를 따를 수는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독일의 전후 과거사 사죄는 진정한 반성이 아니라 국제환경에 부응하려는 선택이었을 뿐이라고 폄하한 것이다. 동시에 일본이 사죄하지 않는 것은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이 일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적반하장의 논리도 거리낌 없이 펼쳤다.
사실 아베 총리로서는 ‘사죄할 과거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게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한반도 병탄, 중국ㆍ동남아시아 침략 등 20세기 전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패전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당한 행위라는 역사관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일본에게 패전의 아픔을 안겨준 미국에게만큼은 무릎 꿇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4월 29일 미국 의회 연설에서 그는 “지난 대전에 대해 통절히 반성한다”고 정중히 사과하며, 청중석에 앉아 있는 미국인 2차 대전 참전용사와 그 옆에 앉아 있는 2차 대전 일본군 사령관의 손자를 가리키며 “치열하게 싸운 적이 마음의 유대가 이어지는 친구가 되었으며, 이는 역사의 기적”이라고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
이런 아베 총리가 내놓을 담화에서 향후 한일관계의 해빙의 신호를 찾으리라 기대하는 건 어리석다. 그렇다고 이웃나라 일본과 담을 쌓고 지내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아베 총리의 역사관을 거부하는 수많은 일본인과의 교류를 적극 확대하는 것이다. 다행히 한때 70%까지 치솟았던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사퇴 마지노선인 30%대까지 떨어졌다.
정영오 한국일보 국제부장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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