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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길 위의 이야기] 매를 번 장래희망

입력
2015.08.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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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1 때 영어시간. 교과서 안에 랭보 시집을 감춰 몰래 읽고 있었다. 영어교사는 담임선생님이었다. 수업 중반쯤 선생님이 책을 들고 통로 사이를 오가며 독해를 하기 시작했다. 움찔하는 것도 잠깐, 이내 들통 났다. 선생이 책을 압수했다. 이리저리 펼쳐보더니 “네가 이런 걸 봐서 이해하기나 해? 왜 만날 허튼 짓이야?”라며 책 모서리로 머리통을 쿡쿡 찔렀다. 학생의 본분을 지켜 고개 숙인 채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잠깐 욕먹고 말 일이라 여겼는데, 선생님이 뭔가 벼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커서 뭐가 될 거냐는 둥 공장에나 가지 그랬냐는 둥 짐짓 모욕적인 언사가 반복됐다. 목울대에서 뭔가 시커먼 게 올라온다 싶더니 기어이 엉뚱한 말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거지 될 거예요!” 순간, 선생이 책을 내려놓고 손목시계를 풀었다. 이후 상황은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 교사에게 얻어맞은 장면을 상상하면 빙고. 묵묵히 듣고 사과하거나 하다못해 시인이 될 거예요 하면서 몇 대 맞고 끝날 일을 왜 그렇게 발끈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조금 난감하다. 맺힘 없이 헐벗었으나 자유로운 영혼, 세계 통념과 질서 바깥에서 유유자적하는 낭만적 캐릭터를 떠올렸던 것이었을 텐데 왜 하필 거지였을까. 문득, 지금 사는 꼴을 둘러본다. 여전히 빈한하고 나잇값 못하지만 속은 늘 시원한 느낌. 어? 꿈을 이룬 인생인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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