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의 시 ‘쓰봉 속 십만 원’은 ‘벗어놓은 쓰봉 속주머니에 십만 원이 있다’로 시작한다.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된 노모가 집에 두고 온 당신의 전 재산을 자식들이 모르고 지나칠까 봐 일러주는 말이다.
‘쓰봉’은 바지를 뜻하는 일본말로 일제 시대에 들어와 1970년대까지 널리 쓰였다. 국어순화 운동에 힘입어 ‘와리바시(나무젓가락), 벤또(도시락), 다마네기(양파)’ 등과 함께 이제는 우리말에서 사라져버린 말이다. 중장년 세대는 대부분 알고 있는 말이지만 젊은이들에게 ‘쓰봉’은 낯선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젊은 주부들이 ‘쓰봉’이란 말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말이, 그것도 어렵게 쫓아낸 일본어 외래어가 다시 들어와 사용되고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것은 바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쓰레기봉투’를 줄여 이르는 새말이었다. ‘생일선물’을 ‘생선’으로 ‘생일파티’는 ‘생파’로 줄이는 등, 빠른 소통을 위해 가능하면 줄여 쓰는 젊은이들의 언어 습관이 새롭게 ‘쓰봉’을 탄생시킨 거였다.
이쯤 되니 재미난 상상이 떠올랐다. 위의 시에서 어머니가 손주들에게 ‘쓰봉 속 십만 원’ 얘기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손주들은 안방에 벗어놓은 할머니 바지를 뒤지는 대신 부엌에서 쓰레기봉투를 뒤집어 보며 할머니가 두고 가신 돈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말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세대 간 언어 차이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또한 줄임말은 언어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게 하고, 그 말을 아는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등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줄여 쓰기를 통해 무분별하게 만들어내는 새말은 세대 간 불통을 부추길 수도 있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