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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데탕트 분위기에 휘둘려… 남북, 준비되지 않은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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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데탕트 분위기에 휘둘려… 남북, 준비되지 않은 화해"

입력
2015.08.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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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면전환용 대화… 1년 만에 중단

통일 논의 물꼬 텄지만 곧 깨져

서울 서초구 통일연구원에서 4일 본보와 인터뷰한 조민 통일연구원 부원장.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서울 서초구 통일연구원에서 4일 본보와 인터뷰한 조민 통일연구원 부원장.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한은 1972년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비밀 접촉의 결과물인 7ㆍ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남북은 평화 통일을 지향하자는 이정표를 세웠다. 하지만 체재 대결 국면에서 나온 섣부른 합의는 이내 종이 조각이 됐고 이후 대결 국면은 더욱 가팔라졌다.

조민 통일연구원 부원장은 7ㆍ4 공동성명에 대해 “남북한 최고 지도자의 진정성 있는 결단이나, 자주적 의지가 아닌 국제 사회의 데탕트 분위기에 휘둘려 ‘준비되지 않은 화해’를 종용 받은 탓에 실질적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 6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7ㆍ4 성명 이후 남북한 당국이 맺은 각종 합의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유불리를 따지는 선별적 합의 이행이 아닌, 일단 합의한 것은 모두 지키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73년 11월 3일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참석을 위해 남측 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3년 11월 3일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참석을 위해 남측 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_7ㆍ4 성명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남북한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했다는 점이 가장 크다. 한국전쟁 이후 안보 불안과 긴장이 여전한 상황에서 당국간 대화를 통해 마주 앉은 것 아니냐. 당시 여느 당국자가 말했듯이 7ㆍ4 성명을 통해 한반도는 이제 ‘대화 없는 대결’에서 ‘대화 있는 대결’로 전환된 것이다. 또 한반도 통일 대장정에서 지켜나가야 할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이라는 역사적인 3대 원칙을 천명한 것도 큰 수확이다. 이 정신은 남북기본합의서에 그대로 반영됐고, 6ㆍ15 선언과 10ㆍ4 선언도 관통하고 있다. 7ㆍ4 성명은 남북한 대화와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의 첫 출발로, 남북간 합의의 주춧돌이라고 보면 된다.”

_남북이 체제 대결에 몰두하던 60,70년대에 갑작스레 대화국면으로 전환된 계기는 무엇인가.

“미ㆍ소 진영간 냉전체제는 60년대 말 무렵부터 이념 대결이 아닌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며 상대적인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식으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 닉슨 대통령은 69년 7월 괌에서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 뒤, 72년 2월에 베이징, 5월엔 모스크바를 방문해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됐다. 닉슨독트린에서 나온 게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의 손에’, 그리고 ‘한국 문제의 한국화’다. 닉슨은 남한의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한국 방위의 재조정 의지를 드러냈고, 박정희 대통령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미국 입장에선 미중이 대화와 공존으로 전환되는데 그 하위체인 남북한의 변수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미국대로 박 대통령에게, 중국은 김일성 주석에게 남북대화를 종용했다.”

_남북이 수동적으로 대화 테이블에 앉았다는 의미인가.

“박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에 나서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다고 한다. 60년대 말은 청와대 앞 마당까지 습격한 김신조 사건부터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 북한의 도발이 잦아 53년 휴전 이후 군사적 긴장과 갈등이 최고조로 올랐던 시기였다. 하지만 주한미군 철수 등 국가 안보 차원의 위기가 도래하면서 남북대화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우리가 먼저 1차 탐색전 행태로 71년 이산가족 문제를 고리로 선제적 대화 제의를 했고, 김일성이 1년 정도 지나서 수용했다. 김일성이 대화 수용을 주저하자 중국에선 남북대화가 이뤄져야만 주한미군이 주둔할 명분이 사라지니 손을 잡으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도 남북관계 개선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_7ㆍ4 성명 발표 이후 합의 문구를 두고 남북한에서 다른 해석이 나왔는데.

“당시 우리 국민들은 당장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7ㆍ4 성명을 성사시킨 주역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속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이라는 3대 원칙은 사실 김일성의 제안을 우리가 많이 수용한 편이었다. 특히 가장 대립한 게 ‘자주’라는 문구였는데, 북한은 외국의 간섭이 없는 상태, 즉 주한미군 철수를, 우리는 남북한 당사자간 협의를 자주로 해석했다.”

_7ㆍ4 성명 발표 이후 1년 만에 당국간 대화는 중단됐다. 동력을 잃은 이유는 무엇인가.

“남북한 지도자 공히 7ㆍ4 성명을 남북대화 자체를 목표로 뒀다기 보다는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면 전환 도구로만 활용한 탓이다. 박 대통령은 당시 안보 위기, 장기 집권 체제를 위협하는 야당의 도전 등에 직면한 상황에서 대북정책의 전환으로 활로 모색이 필요했다. 북한 역시 7ㆍ4 성명을 계기로 더욱 심화된 평화공세를 펼치며 체제 정비에 활용했다. 남북한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해 12월 27일, 남한에선 유신체제를 출범시켰고, 북한에선 유일체제가 제도적으로 확립됐다. 결과적으로 민족사적인 커다란 이벤트의 환희가 각각 남북한 체제의 장기집권과 1인 지배 체제를 굳히는 데만 도움을 준 것이다. 양측 공히 7ㆍ4 성명을 발표만 했지, 우리가 이걸 왜 계속 추진해야 되는지에 대한 동력이 부족했다. 이후 북한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문제 삼아 공식적으로 남북대화를 거부하며 7ㆍ4 성명 발표 이후 전개됐던 대화 국면도 13개월 만에 일단락 됐다. 이후 미소는 다시 신(新) 냉전 체제로 접어 들었고 더 이상 남북간 화해무드에 신경 쓰지 않았다.”

_7ㆍ4 성명의 실천적 합의 이행을 위해서 남북한 당국이 주력해야 할 대목이 있다면.

“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합의 됐을 때, 우리 당국자가 ‘이건 바로 휴지조각이 되겠구나’ 라고 느꼈다고 한다. 우리가 하자는 방향대로 북측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보고 실제로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지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합의를 했다는 건데, 그러나 적어도 합의를 했다면 남측에 유리하냐, 북측에 유리하냐 따지면 안되고, 모든 합의문을 존중해야 한다. 선별해서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안 지키면 싸울 수밖에 없다. 7ㆍ4 성명의 정신을 기초로 모든 합의를 절실히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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