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의 첫 월요일은 6일이었다. 이날 새벽 서태평양 사이판 근처 티니언 섬에서 총 7대의 B29 폭격기가 북쪽으로 출격했다. 먼저 출발한 석 대는 각각 고쿠라, 나가사키, 그리고 히로시마의 기상관측 임무를 띠고 있었다. 비상대기조 한 대를 제외한 나머지 석 대는 한 시간 뒤인 새벽 2시 45분에 이륙했다. 폴 티비츠 대령이 몰았던 ‘에놀라 게이’라는 이름의 B29에는 사상 초유의 폭탄이 탑재돼 있었다.
폭격수 톰 페러비가 폭탄을 투하한 시각은 8월 6일 오전 8시 15분 15초였다. 폭탄은 45초 뒤 히로시마 한가운데 ‘상생의 다리’ 상공 555m에서 터졌다. 그 어떤 사전시험도 거치지 않았던 사상 최초의 우라늄 폭탄은 그렇게 터졌다. TNT 1만5,000톤 규모, 폭심의 온도는 태양 표면의 1만 배에 달하는 6,000만도였다. 폭발 뒤 처음 몇 초 안에 약 8만명이 사망했고 12㎢의 면적이 초토화되었다. 3일 뒤인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이 투하되었다. 8월 15일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면 도쿄에 세 번째 핵폭탄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개념과 인류의 역사를 바꾼 이 신형폭탄은 물리학자들이 만들었다. 핵무기 제조를 위한 일명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로버트 오펜하이머, 한스 베테, 엔리코 페르미, 아서 콤프턴, 유진 위그너, 리처드 파인만 등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총동원되었다. 물리학자들이 쓸모 있는 족속임을 각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핵무기였다. 1911년 원자핵이 발견된 이후 34년 만에 핵무기가 실전에 투하되었으니, 원자핵 발견 당시 이게 어디에 쓸모 있겠느냐고 빈정대던 사람이 있었다면 살아생전에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최근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암살’에서 황덕삼이 김원봉에게 암살작전 수행 중 어쩔 수 없을 땐 민간인을 죽여도 되느냐고 묻는다. 김원봉은 일본 민간인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대량살상을 할 수밖에 없는 핵무기는 김원봉의 철학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나는 영화 ‘암살’을 보면서, 만약 내가 당시 조선의 핵물리학자로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하려고 했다면 김원봉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했다. 실제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적지 않은 과학자들은 자신이 만든 핵무기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데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조선의 과학자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제아무리 핵무기라 해도 친일 부역자를 처단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물리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그 어떤 핵무기도 광복은 시켜줄 수 있지만 진정한 독립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일본군을 몰아낼 수는 있어도 밀정을 죽이고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지는 못했다. 염석진을 처단한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안옥윤의 총알이었다. “밀정이면 죽여라.” 핵무기도 해결하지 못한 임무, 광복 70주년에 더욱 사무친다.
이종필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BK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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