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후계구도 오래 전 정리했어야
지금껏 방치한 신 회장이 근본책임
승계 못 정한 타 재벌그룹들에 경종
롯데 진흙탕 싸움의 시작점은 창업자 신격호 총괄회장이다. 직접 싸운 건 형 신동주 전 부회장과 동생 신동빈 회장, 그리고 그들 주변의 친인척들이지만 근본적 원인제공자는 딱 한 사람 아버지 신격호 회장이다. 본인 나이가 이미 아흔을 훨씬 넘겼는데도, 게다가 두 아들이 환갑이 되었는데도, 누구에게 그룹을 물려질 지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것이 이 막장 가족드라마의 탄생 배경이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롯데의 소유지배구조가 이 정도로 복잡할 줄을 몰랐다. 무려 416개에 달하는 거미줄보다도 더 복잡한 순환출자고리하며, 국경을 넘나드는 지분관계하며, 광윤사 L투자회사 등 미스터리한 이름을 가진 베일 속 회사들이 정점에 서 있는 소유구조까지. 확실히 투명, 개방, 분산과는 거리가 먼 그룹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의 싸움은 이 이상한 소유지배구조와는 별개 문제다. 순환출자를 없애고 지주회사로 전환한다고 해서, 지분관계나 주식현황을 낱낱이 공시한다고 해서 경영권 분쟁이 저절로 차단되는 건 아니다. 회사지배권을 둘러싼 재벌들의 모든 집안싸움은 승계와 재산배분이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을 때 발생한다. 롯데보다 더 낡고 복잡한 족벌기업이라도 경영권 계승자가 확실하면 이런 사태는 생기지 않는다.
일반적 시각에서 본다면 아들을 내치고, 아버지를 내쫓고, 형제끼리 치고 받는 걸 두고 ‘콩가루~’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신동주ㆍ동빈 형제가 특별히 더 탐욕스럽거나 반인륜적이라고 몰아갈 수는 없다고 본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런 패륜적 골육상쟁의 상황을 만들어 낸 건, 이미 오래 전 매듭지었어야 할 후계자 선정을 여태껏 끌고 온 신격호 회장의 책임이다. 본인건강과 능력에 대한 과신 때문인지, 자식들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는 전적으로 신격호 회장이 자초한 것이다.
대부분 재벌그룹은 일정 시점이 되면 후계자 교통정리를 마무리 짓는다. 통상 LG그룹 같은 장자승계가 가장 무난하다고들 얘기하지만, 무조건 그게 베스트는 아니다. 삼성그룹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3남(이건희 회장) 승계를 통해 회사를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렸다. SK그룹처럼 형(고 최종건 창업주)→동생(고 최종현 회장)→동생의 장남(최태원 회장)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동원그룹처럼 아버지(김재철 회장)가 일찌감치 그룹을 둘로 쪼개 장남(김남구 한국금융지주 부회장)과 차남(김남정 동원그룹 부회장)에게 나눠주는 케이스도 있다. 경영권 승계에 하나의 정답이란 없으며 장자 계승이든, 능력에 의한 선택이든, 조기 그룹분할이든 어떤 경우든 후계구도의 선을 확실하게 긋는 게 중요하다.
신격호 회장은 여러 면에서 일본스타일(친일이란 뜻은 아니다)이었지만, 정작 일본기업들의 승계전통은 외면했던 것 같다. 100년 가까이 오너가족이 이끌어오다 10여년 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한 마쓰시다, 필요에 따라 전문경영인체제와 오너 직접경영을 선택하는 도요타와 소니, 오너일가는 경영에 나서지 않고 지분만 보유하는 혼다…. 어떤 일본의 간판기업도 신격호 회장처럼 끝까지 본인이 다 쥐려다가 결국 회사를 위험에 빠뜨리진 않는다. ‘소유경영분리=선, 가족경영=악’이란 이분법엔 결코 동의할 수 없고, 오너경영이 훨씬 효율적인 측면도 많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승계만은 명확하고 예측가능 해야 하는데 그는 이 진리에 고개를 돌렸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에서 피땀으로 번 돈으로 모국의 서비스업 기반을 닦은 것에 무척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욕과 불신 때문에 결국 이 모든 명예를 다 잃게 됐다. 원인을 제공한 그가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텐데, 지금 건강이나 판단력 등을 고려하면 이젠 결자해지마저 불가능해 보인다. 참으로 쓸쓸하고 불행한 퇴장이 아닐 수 없다.
국내 재벌 중엔 아직도 모든 걸 다 움켜쥐고 후계문제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고령의 오너들이 꽤 있다. 신격호 회장의 치명적 실수를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한다.
이성철 국차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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