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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복싱과 디폴트

입력
2015.08.0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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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흑백TV 시절, 프로복싱은 국민 스포츠였다. 홍수환이 남아공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누르고 WBA 밴텀급 챔피언이 된 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며 흥분하던 목소리, 파나마 적지에서 ‘저승사자’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통쾌한 역전 KO로 눕히고 4전5기의 신화를 쓴 장면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멕시코의 알폰소 사모라에게 KO패로 타이틀을 내주고 리턴 매치에서도 TKO로 무너졌을 때는 내 일처럼 가슴이 아팠다.

▦ 멕시코 파나마와 함께 당시 중남미의 복싱 전성기를 구가했던 나라가 미국 자치령 푸에르토리코다. 염동균에게 WBC 슈퍼밴텀급 타이틀을 빼앗은 뒤 ‘멕시코의 영웅’ 카를로스 사라테 마저 거꾸러뜨린 윌프레도 고메즈, 17세 5개월의 나이로 최연소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에 오른 뒤 슈거레이 레너드에 무너지기 전까지 복싱천재로 군림했던 윌프레도 베니테즈, 무패 행진의 오스카 델 라 호야를 꺾고 WBC 웰터급 챔피언에 올랐던 펠릭스 트리니다드 모두 푸에르토리코가 낳은 불세출의 영웅들이다. 올해 말 멕시코의 사울 알바레즈와 세기의 대결이 예상되는 미구엘 코토가 이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 스페인어로 ‘부유한 항구’라는 뜻의 푸에르토리코는 스페인에 400년간 식민지배를 받다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미국 자치령이 됐다. 미국 대선이나 상ㆍ하원 선거권은 없으나 시민권은 갖고 있고, 미 연방으로부터 면세와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자치령 유지와 독립, 주 편입을 놓고 정파가 갈려 있다. 한국전쟁 때 미군 제65보병연대 등에 연 인원 6만여 명의 푸에르토리코 병사들이 참전해 장진호 전투 등 9개 주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

▦ 푸에르토리코가 5,800만 달러의 채무를 갚지 못해 이달 초 미국 5개 자치령 중 처음으로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사탕수수 외에는 별 수입원이 없으면서도 연방 지원만 믿고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해온 탓이다. 정식국가가 아니어서 국제금융기관의 구제금융을 받을 수 없고, 미 연방도 재정 지원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본토 히스패닉계 표심을 의식한 미 대선 주자들의 발길만 분주하게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 계륵 같은 존재인 푸에르토리코 주민이 복싱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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