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딸에 바친 일기 형식, 주인공 몸의 변화 날짜별로 기록
날뛰는 정신과 한계에 처한 몸, 분노 대신 몸과 정신의 대화 제안
몸과의 괴리감. 정신이 몸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 드는 이 괴리감은 생각보다 너무 자주 무시된다. 임신과 육아에 대한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다리 사이에서 피가 흐르거나 자존심을 굽힐 준비가 전혀 안 됐음에도 제멋대로 성기가 부풀어오르는, 이 천인공노할 몸의 방종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넘어가주는 것이다. 몸이 던져주는 수많은 사유거리를 뒤로하고 우리는 몸보다 세상과 먼저 친해진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소통불능의 세계를 향해 첫 발을 떼게 된다.
30년 가까이 프랑스 중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친 다니엘 페나크는 ‘말로센’ 시리즈’와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 ‘소설처럼’ ‘학교의 눈물’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2012년 펴낸 장편소설 ‘몸의 일기’는 단어 그대로 한 남자가 딸에게 바치는, 자신의 몸에 관한 일기다.
“딸아, 이건 내면 일기는 아니란다. 너도 알겠지만, 난 끊임없이 요동치는 정신의 상태를 반추하는 데 대해선 거부감을 갖고 있거든. (…) 난 매일매일의 느낌을 적은 게 아니란다. 열두 살 때부터 여든여덟 살 마지막 해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일이 생길 때마다 - 우리 몸은 놀랄 거리를 제공하는 데 인색하지 않지 - 기록을 한 거란다. 사랑하는 내 딸, 이게 바로 내 유산이다. 이건 생리학 논문이 아니라 내 비밀 정원이다.”
책에는 남자의 이름도 직업도 나오지 않는다. 1923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2차대전을 겪고 한 여자를 만나 자녀와 손주를 본 뒤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한 남자가 겪은 몸의 변화가 날짜 별로 기록돼 있을 뿐이다. 첫 몽정과 첫 섹스를 거쳐 욕망이 사그라지고 온 몸이 끊임없이 고장을 일으키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남자의 시선은 오로지 몸에만 머무른다. 눈, 코, 성기, 피부, 재채기 소리, 트림 냄새, 오줌 누는 기술, 똥의 모양. 남자는 몸과 그 부산물들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삶의 모든 장면을 ‘몸의 일’로 환원시킨다.
“23세 5일. 늙은 직장 우두머리와 젊은 구직자의 대면에는 뭔가 육체적인, 거의 동물적인, 아무튼 원초적으로 성적인 면이 있다. 두 세대가 대치한다. 죽어가는 세대와 그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세대. 결코 점잖지 않다. 얼핏 보이는 것과 달리, 교양이나 학위들은 거기서 별 역할이 없다. 불알과 불알의 대결이다.”
“46세 3개월 11일. 광고판의 현란한 글씨들조차도 내게 저항한다. 그래 좋다, 이젠 멀리 있는 것도 안 보인다 이거지! 위협 당하는 느낌. 원초적 감정? 오래된 본능? 내 사냥 영역이 축소되는 것 같은 느낌? 뭐 그런 것. 내 눈은 더 이상 초원을 지배하지 못한다.”
“86세 2개월 28일. 점점 짧아지는 보폭, 굳어버린 무릎, 또 다시 비대해진 전립선, 점점 잦아지더니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낮잠. 내 몸과 나는 서로 상관없는 동거인으로서, 인생이라는 임대차 계약의 마지막 기간을 살아가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 새파랗게 날뛰는 정신과 대조적으로, 한계투성이인 몸은 우리를 땅으로 끌어내려 흙 속으로 처박는다. 분노 혹은 달관의 반응 대신, 작가는 대화를 제안한다. 콧구멍과 성기와 비듬과 설태를 가만히 살필 것. 그것들이 원래 차지해야 할 관심과 위상을 돌려줄 것. 그럼으로써 황폐했던 비밀의 정원엔 비로소 식물이 싹 트고, 공동의 영토가 될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 이명, 내 신트림, 내 불안증, 내 비출혈, 내 불면증…결국 이것들이 내 자산인 셈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과 함께 공유하는.”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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