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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시골이라는 환상

입력
2015.08.0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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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가 그런 사고를 칠 줄이야. 마흔의 그녀는 재기발랄하고 총명했다. 귀염둥이 막내딸로 공부와 일만 하며 부족함 없이 살아온 친구였다. 그런 S가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살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웃어 넘겼다. S와 시골은 도무지 어울려 보이질 않았으니. 작년에 남도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본 집을 샀다고 했을 때도 노후 준비를 일찍 해둔다 싶었다. 귀농학교를 다닌다 할 때도 결혼 하면 신랑이랑 같이 내려가려나 했다.

그런 나를 비웃듯 S는 지난 달에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서 남도로 내려갔다. 그녀의 용기가 부러워 샘이 날 정도다. 혼자서 세상을 떠도는 나도 용감하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여행은 지나가는 이방인이 흘깃 들여다보는 행위일 뿐이다. 생활이 없는 그 자리에는 부딪힐 일도, 고단할 일도 없다. 하지만 보수적인 공동체 문화가 남아있는 시골에서 여자 혼자 살아가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건 안전 문제다. 나는 여행지에서 문단속부터 하는 겁쟁이다. 겁이 많으니 의심도 많다. 시골이라고 선량한 사람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시베리안 허스키를 세 마리 정도 마당에 풀어놓아도 잠자리가 불편할 게 틀림없다. 그 다음은 익명성의 문제다. 시골에는 농경사회의 공동체 의식이 만든 끈끈한 관계가 살아있다. 도시에서처럼 내가 원할 때만 적당히 어울리며 익명으로 남을 자유가 없다. 사전 약속도 없이 찾아와 “이 집은 뭐 해먹고 살아” 하며 냉장고 문을 여는 일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이것저것 재고 따지면서 몇 년째 망설이고만 있는 나로서는 S의 결단력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며칠 전 그녀에게 탐색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통통 튀었다. “우리 동네 정말 좋아요. 여기로 오길 진짜 잘 했어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너무 재미있어요.” 애인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재래식 화장실에 대해서조차 “밤하늘의 별똥별을 보며 똥을 싸는 기분이 최고예요”라고 했을 정도다.

불편한 점은 없냐고 추궁하니 그제야 이렇게 답했다. 작은 동네라 마을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고. 귀농 한 달 만에 가입하라고 권유 받은 모임이 무려 5개. 가끔 동네 사람들이 의구심 어린 눈길로 외지인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고. 그 대목에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쓸어 내렸다. 역시나. 사실 S는 여자 혼자서 시골로 내려가는 일의 대가를 이미 치르기도 했다. 집을 소개해 준 ‘귀농 선배’가 ‘소개료’로 그녀에게 수백 만원을 요구했다. 결국 S는 부동산에 치른 복비 외에 그 선배에게 따로 돈을 건넸다. 한 마을에서 얼굴을 봐야 하는 처지라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S가 남편이나 가족과 함께 내려갔다면 그런 돈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그녀 덕분에 책장에서 야마오 산세이의 ‘여기에 사는 즐거움’을 꺼내 다시 뒤적거렸다. 야쿠시마의 산 속에서 농사 짓고 글 쓰며 지낸 그의 삶은 내가 꿈꾸는 삶이다. 하지만 그에겐 가족이 있지 않았던가. 버몬트의 시골에 내려가 돌집을 짓고 살며 ‘조화로운 삶’을 쓴 헬렌 니어링에게도 스콧이라는 최고의 반려자가 있었다. 위로가 되지 않던 차에 나에게 맞춤인 책을 찾아냈다. 마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시골 마을에서 소설을 쓰며 40년 넘게 살아온 이 할아버지는 시골을 향한 도시인의 환상을 도끼로 나무 쪼개듯 박살낸다.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고, 시골이니 문을 잠글 필요가 없다는 건 오랜 전설일 뿐이며, 돌잔치에 빠지는 순간 찍히는 거고, 시골에 간다고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한 마디로 “어딜 가든 삶은 따라온다”며 초를 제대로 쳤다. 그래, 내가 있을 곳은 도시야. 난 옥상 텃밭도 가꾸니까 그걸로 됐어. 책을 덮으며 얌전히 욕망도 덮었다. 부디 S의 모험이 성공해 나에게도 용기를 주기만 바랄 뿐이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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