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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기]'우과천청'(雨過天靑)의 아름다움, 관요官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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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기]'우과천청'(雨過天靑)의 아름다움, 관요官窯

입력
2015.08.0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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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요봉황쌍이병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는 중국 북송 문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명·청시대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다. 골동품의 수집 역사를 확인하면 송나라때 사대부들이 관요를 모으는 취미부터 시작하여 명·청대를 거쳐 꾸준히 발전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역사에서 진정한의미의 관요는 명홍무2년에 어요공장을 경덕진에 설립하였다. 최고의 장인을 모으고 최고의 자토를 이용해 황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만들었다. 이런 도자기는 민간에서 사용하고 매매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구워만드는 방법과 배합방법은 대외로 엄격하게 비밀에 부쳤다.

중국도자기는 큰 틀에서는 '관요'와 '민요'로 나뉘어지고 관요는 황실과 귀족을 위한 어용품을 진상하기 위해 제작되었고 민요는 수출용자기와 서민들의 실생활도구로 생산되었다.

14세기 중국 도자기 산업은 전세계적으로 각광받는 하이테크 산업이었으며 수출을 위해 많을 땐 1년에 1,000만개의 도자기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란의 아르데빌궁전에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청화백자 618점· 백자 80점·청자 58점 등 여러점의 다채자기를 소장하고 있다. 또 터키 톱가프궁전은 세계최대의 총1만358점의 중국 수출 자기들이 소장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중기부터 일부 문인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 수집 열기가 사라졌다. 그러다 조선 말기부터 실학사상과 함께 다시 살아나고 일제 강점기 경제적 이익에 의해 활성화 되었다.

관요는 송대5대 명요중 하나이며 일찍부터 국제경매에서 그 가치가 여요와 더불어 쌍벽을 이룰 만큼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우과천청(雨過天靑)이라는 말처럼 맑고 청아하고 깨끗한 비 온 뒤의 하늘의 푸르름에 비유하고 있다.

관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북송의 휘종 대관(1107∼1110) 정화(1111∼1118) 연간에 변경에 직접 가마를 설치하고 가마를 제조하였다. 이를 관요라고 명명했는데 그 태토(재료)는 치밀하고 윤기가 있으며 태체(색감)는 박질(엷고 미세한 느낌)이다. 유색은 청색에 분홍색을 띠며, 농담은 일정하지 않고 유면에 해조문이 있다. 구연부는 자색을 띠고 족부는 짙은 흑자색을 띠는 이른바 '자구철족(紫口鐵足) 현상이 나타난다.

북송관요에 대한 송대 사료로는 도종의의 '철경록'(輟耕錄)과 엽치의 '탄재필형'(坦齋筆衡)이다. 탄재필형에는 "정화연간, 수도에 가마를 설치하여 그릇을 굽는데 관요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남송천도 이후 소성장이 후원의 제거(提擧)가 되어 소국이라 불렀는데 북송의 제도를 받들어 수내사에 가마를 설치하고 자기를 소성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첸쩡샤는 '중한고미술협회'이사로 1,000여 점의 중국도자기를 두루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CC'는 중국도자기(Chinese ceramics)를 뜻한다.

채준 기자 doorian@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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