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가와 수미코 글, 아카바 수에키치 그림
가난한 날품팔이 청년 요헤이는 눈 덮인 산에서 화살에 맞은 두루미를 구해준다. 그날 밤 웬 어여쁜 아가씨가 문을 두드리고 아내로 맞아달라고 한다. 둘은 결혼한다. 먹을거리가 떨어지자 아내는 실도 없이 베를 짜겠다고 한다. 그리고 베 짜는 모습을 절대 들여다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가리개 뒤에서 사흘 밤 사흘 낮 동안 짠 아름다운 베는 비싼 값에 팔린다.
아내가 수척해진 만큼 요헤이는 돈맛을 알게 된다. 요헤이의 성화에 아내는 마지막이라며 두 번째 베를 짜지만 요헤이의 욕심은 끝이 없다. 결국 아내는 또 베를 짜게 된다. 베를 짤 때마다 수척해지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린 요헤이는 궁금한 마음에 가리개 뒤를 보고야 만다. 가리개 뒤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깃털을 뽑아 베를 짜고 있는 피투성이 두루미였다. 결국 그는 아내를 잃는다.
일본 설화답게 엽기를 탐미로 승화시키는 구석이 있다. 안데르센 상을 받은 일본의 그림책 작가 아카바 수에키치가 단정하면서도 묘한 그림을 얹었다. 아카바 수에키치의 그림 덕에 슬픔은 아련한 날개를 달고 엽기는 우아한 기품을 얻었다. 1979년에 첫 출간된 그림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된 맛이 있다.
인간 여자로 변신한 동물과 결혼한 남자가 금기를 깨뜨려 결국 아내를 잃게 된다는 설화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동물 쪽에서 남자에게 먼저 다가간다는 점도 비슷하다. 바로 우렁각시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은 우렁각시를 해피엔딩으로 기억하지만 (대다수의 우렁각시 그림책은 해피엔딩을 설파한다) 원래 이 설화의 결말은 비극이다. 원님 또는 임금에게 각시를 뺏긴 사내가 한이 맺혀 죽었다는 이야기가 더 많이 채록되었다고 한다. 사내가 죽어서 파랑새가 되고 우렁각시도 따라 죽어 참빗이 되었다는 결말이 원형에 가깝다. 임금에게 각시를 뺏겼다가 그를 물리치고 각시를 되찾아 심지어 새 임금이 된다는 이야기는 민중의 바람이 담긴 변이형이다.
우렁각시의 남편이 각시를 잃게 된 것도 금기를 어겼기 때문이다. 우렁이가 어여쁜 여자로 변해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본 사내가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우렁각시는 아직 때가 아니니 사흘 또는 3년만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사내는 참지 못해 우렁각시를 붙들고 늘어져 비극의 씨앗을 뿌린다.
두루미 아내 설화와 우렁각시 설화에는 옛 사내들의 로망과 옛 여인네의 한숨이 묻어난다. 가난하고 순진한 사내는 예쁘고 착한 데다가 능력까지 있는 아내를 어느날 갑자기 얻는다. 두루미 아내는 죽어라 베를 짜고 우렁각시는 끝없이 밥상을 차린다. 미욱한 남편은 아내의 사정을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 급급하다. 아내 말을 안 듣고 하지 말라는 일을 기어이 해 사달을 만든다. 이야기 속의 금기는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니 그렇다고 치지만, 우리 현실 속의 남편들도 아내 말을 참 안 듣는다.
한국의 우렁각시보다 일본의 두루미 아내 쪽이 더 상황이 안 좋아 보인다. 각시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농사일을 놓아버리는 우렁각시의 남편은 그저 책임감이 없고 무능력할 뿐이지만, 두루미 아내의 남편은 돈 욕심에 아내 몸이 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두루미 아내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피에 젖은 몸으로 남편을 떠나며 하는 말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세요”라니...
‘두루미 아내’를 딸에게 읽어주면서 두루미 댁의 한숨이 손에 잡힐 듯해 마음이 답답했다. 당연히 요헤이가 미울 수밖에. 뭇 여인네의 한과 한숨을 꾹꾹 눌러 담아 요헤이를 미워했다. 그 미움을 딸에게 전염시키려고 수작을 걸었다. “이 아저씨 진짜 욕심 많고 나쁘다, 그치?” 그런데 딸의 대답이 심상찮다. “아저씨도 나쁘지만 두루미가 더 나빠”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두루미인 걸 숨기고 결혼했잖아. 두루미인 걸 아저씨가 알았다면 결혼을 거절했을 수도 있는데” 딸에게는 두루미 댁이 이른바 ‘유책 배우자’였다. 본인도 하지 말라는 일을 기어이 하는 데에는 선수라서 그런가. 딸아이는 아내가 아닌 남편 편을 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딸에게 말해주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너도 커서 결혼해 아이 낳고 살면 알 것이다. 수많은 두루미 댁과 우렁 댁의 한숨을...’
김소연기자 au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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