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인 교내 기구 교원들이 장악
교장 재량권도 지나치게 커
내부 권력 견제할 외부 전문가 필요
서울 서대문구 A고 교사 5명이 동료 여교사와 제자들을 상대로 성추행과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의혹(본보 1일자 24면)은 시교육청과 학교의 성범죄 대응시스템에 작동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행 대응시스템이 사실상 내부 교원에게 실체 조사를 전담시키고, 교장에게는 조사보고를 묵살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해자들인 교사와 교장이 이 같은 시스템을 장악하면서 A고에서 자행된 첫 번째 성범죄가 폭로되기까지는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고, 그 사이 유사한 범죄가 반복됐다.
2일 서울시교육청 등에 따르면 교원들의 학생지도를 돕기 위해 매년 교육청이 일선 학교에 전달하는 ‘학생생활교육 내실화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에는 학교폭력(성폭력 포함) 발생 시 ‘성고충상담위원회’ 또는 ‘전담조사기구’→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교육(지원)청’에 이르는 처리 절차가 명시돼 있다. 성범죄를 인지한 학생 및 교사가 교내 전담조사기구에 신고하거나 직접 성고충상담위원회에 조사를 신청하면 관련 조사를 한 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열어 가해자 처벌 등 조치를 취하고 마지막으로 교육청에 보고하도록 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하지만 A고 사건에서 처리절차는 첫 단계부터 무력화되면서 이후 절차가 모두 생략돼, 기본계획은 무용지물이 됐다. 결국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교장 및 교사 5명의 부정한 행위는 모두 교육청에 제기된 민원과 피해자의 경찰고발, 설문 등 학교 밖의 시스템을 통해 밝혀졌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학생들이 최초로 도움을 청하는 교내 기구에 기존 교원들을 견제할 외부 전문가의 참여가 제한 돼 있다는 점이다. 기본계획에 따르면 전담조사기구는 교감과 보건ㆍ상담ㆍ생활지도 교사 등으로만 구성하도록 돼 있다. 성고충상담위원회의 경우 1인의 외부 위원을 두도록 했으나, 이를 지키는 곳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보직을 맡은 선생님들이 학교가 성추문으로 시끄러워지는 것을 꺼려, 외부위원의 참여를 부정적으로 본다”며 “최초 문제제기가 교내 권력관계에 묻혀 신고 단계부터 묵살되는 일이 많다”고 현실을 인정했다.
학교장에게 지나친 재량권을 부여한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기본계획에는 ‘학교장이 자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으로 ‘학생에게 피해가 있었다고 볼 객관적 증거가 없는 경우’라는 조항이 있다. 무분별한 사건접수와 그로 인한 행정력 낭비를 막기 위해 마련된 장치인데, 이번 사건의 경우 교육청 보고의무가 있는 교장이 가해자였던 만큼, 성범죄를 처리할 땐 교장의 재량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우옥영 보건교육포럼 이사장은 “스웨덴 등 선진국은 실무 책임자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해 교장의 전횡을 견제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건 접수단계부터 외부 전문가가 다수 참여하는 위원회 구성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김미순 천추교성폭력상담소장은 “교육청이 직접 심사 및 조사를 벌여 학교 내부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며 교내 최고 결정권자인 학교장의 인식 변화도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유명무실해진 매뉴얼(기본계획)을 현실화 하기 위해 정부가 외부 전문가 위촉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찰, 성추행 고교 본격 수사
교장과 교사들이 여교사와 여제자들에게 성추행과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서울 서대문구 A고에 대해 경찰이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2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피해 여교사와 학생들의 설문 내용을 넘겨 받아 분석 중이다. 설문 분석이 끝나면 혐의 사실에 관한 피해자 진술을 청취한 후 가해 교사들을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경찰은 혐의 경중에 따라 구속 수사도 배제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시교육청이 현재 가해 교사들과 교장을 상대로 진행하고 있는 추가 감사가 15일 마무리되는 대로 결과를 건네 받아 수사하기로 했다.
시교육청은 지난달 31일 특별감사 중간 결과 발표에서 A고 교장과 교사 5명이 지속적으로 성추행과 성희롱을 저질렀다는 진술을 확보해 형사 고발했다. 5명의 교사 중 B교사는 4월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송치됐다. 하지만 그는 직위해제 기간 동안 교내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는 등 여러 차례 학교에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확인됐다. C교사의 경우, 시교육청 감사로 직위 해제된 뒤 형사 고발당해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인데, 관련 혐의를 대부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감사에서 새롭게 혐의가 드러난 교사 3명과 여교사 성추행 및 가해 교사들의 범행을 묵인한 혐의로 고발된 교장의 범행 입증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수기자 ddackue@hankookilbo.com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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