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1차 세계대전 참전 대가로 양측에 독립·국가 건설 비밀리 약속
위임통치 거쳐 1947년 유엔총회서 두개의 국가로 지역 분할 결정
아랍인이 바라는 평화 로드맵
중동전서 점령한 지역 반환하고 정착촌·예루살렘 수도화 포기하면
평화공존 합의점 찾을 수 있어
20세기 이후 지구촌 분쟁의 많은 부분이 팔레스타인 문제와 크고 작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테러와 폭격이 이어지고 수 많은 생명들이 일상으로 죽어나가고 있다. 도대체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기약 없는 운명적 투쟁을 계속하는가?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며 아랍인들은 서구와 미국, 이스라엘을 향해 무엇을 요구하고 어떤 해결을 원하는가?
1,800년 이상 평화롭게 공존해 온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소수의 유대인과 다수의 아랍인들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1,800여년 동안 척박한 생태계를 공유하면서 팔레스타인 땅에서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왔다. 인류역사상 이처럼 오랜 기간 상이한 두 민족과 종교가 공존해 온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문제의 발단은 1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식민치하의 아랍인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영국은 1915년 12월,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알려진 비밀협상을 통해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워주는 대가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에 그들의 독립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면서 유명한 ‘아라비아의 로렌스’ 대령을 보내 아랍의 대 오스만 공격을 독려했다. 이미 서구에 맞서 지하드(성전)를 선포한 상태에서 종교적 배신은 쉽지 않았지만, 아랍은 식민지 지배보다 독립을 선택했다.
동시에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고 독일에 대한 측면 공격을 위해 유대인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발포오는 1917년 영국의 은행재벌 로드 차일드와 만나 소위 ‘발포오 선언’이라는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유대인의 전쟁참여 대가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 창설을 약속해 주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가 1916년 5월 16일, 따로 사이크스-피코 비밀 조약을 맺어 프랑스는 시리아의 해안지대와 그 북부를,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바그다드를 점령하기로 영토분할을 한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에 약속한 상호 모순된 3개의 비밀조약과 강대국의 비도덕적 정치음모가 오늘날 중동분쟁의 근원적 불씨가 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분할의 비열한 음모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은 1919년 파리 강화회담에서 통과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지지를 얻어,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의 영국 위임통치안을 통과시키고, 1922년 국제연맹에서 이를 추인 받았다. 영국에 배반당한 것을 안 아랍인들은 본격적인 국가독립 투쟁을 시작했다. 반서구 저항의 시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서고 유대인들이 대거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면서 토착 아랍인과의 갈등도 갈수록 증폭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47년 11월 29일 열린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운명이 결정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 날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하여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독립국가로 분할하자는 미국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찬성 33표, 반대 13표였다. 그 내용은 당시 인구비에서 아랍인의 3분의 1, 전체 면적의 7%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를 분할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생계기반인 이 지역 올리브 농장과 곡창지대의 80%, 아랍인 공장의 40%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은 유대인 차지가 되어 버렸다.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의 분노와 좌절은 극에 달했다. 불공정한 결의안으로 유대인 입장을 일방적으로 보호해 준 미국의 태도가 오늘날 반미 성향의 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눈 여겨 볼 의미가 있다. 아랍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그 날, 팔레스타인 문제의 1차적 책임자인 영국은 기권을 택했다.
유엔 결의안 직후 유대인들은 구체적인 건국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토착 아랍인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큰 차질이 초래되었다. 이때 유대 테러조직이 끔찍한 데일 야신촌 학살사건을 유발헸다. 유대 극우조직인 이르군은 1948년 4월 9일, 예루살렘 서쪽의 조그만 마을인 데일 야신촌을 야밤에 습격하여 254명의 주민을 잔인하게 무차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 사건은 문명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아랍주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로부터 한 달쯤 지난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아랍인을 몰아낸 곳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다.
세계는 2,000년 유랑생활을 마무리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유대인들의 승리에 동정과 축하의 눈길을 보냈다. 바로 그 날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면서 응어리진 분노로 조국탈환의 결의를 다졌다. 유대인 박해와 나치정권에 의한 홀로코스트는 유럽에서 일어난 유럽인들의 과오였다. 왜 유럽인들이 저질렀던 유대인 대학살의 죄값을 아무런 역사적 책임이 없는 아랍인들에게 전가시켜야 하나. 만나는 아랍인들마다 절절이 되묻는 질문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미국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원과 역할은 오늘날 중동에서 태생적인 반미 정서가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 국가들의 즉각적인 저항은 전쟁으로 돌입하여 1948년 1차, 1956년 2차, 1967년 3차 중동전으로 이어졌다. 결과는 모두 아랍의 참담한 패배였다. 특히 제3차 중동전에서는 고토회복은커녕, 기존의 아랍 영토마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지중해의 가자 지구, 요르단 강 서안, 골란 고원, 시나이 반도 등이 그곳이다. 유엔은 안보리 결의안 242호, 338호 등을 통해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점령지 반환을 촉구했지만, 그 결의안은 지금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미국이 거부권 행사를 남발하면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비호해 왔기 때문이다. 1973년에는 석유무기화 조치로 석유파동을 유발했던 4차 중동전이 발발했고 1980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사건, 1988년 팔레스타인에서의 비무장 봉기인 인티파다(Intifada) 등을 거치면서 현재는 팔레스타인 강경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공격을 주도하고 있다.
투쟁에서 다시 공존으로
그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폭적인 경제ㆍ군사적인 지원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군사강대국이 되었고, 팔레스타인 영토를 되찾겠다는 아랍인들의 꿈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중재해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을 이끌어냈다. 두 민족은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이 불법점령하고 있는 아랍영토를 당사국에 반환함과 동시에 그곳의 일부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땅과 평화의 교환’이었다. 국제사회는 환영을 표했고, 테러리스트의 대명사였던 야세르 아라파트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수상은 모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평화협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스라엘에 강경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되돌려 주어야 할 땅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분리장벽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압박하자, 하마스를 중심으로 강경 무장 정치세력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포를 쏘아댔다. 이에 이스라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마다 폭격기를 동원하고 첨단 미사일을 쏘아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향한 공공연한 국가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중동 평화 로드맵은 구체적이고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정착촌 건설을 중지하고 분리장벽을 헐고,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수도로 하겠다는 도발을 멈춘다면 평화는 다시 물꼬를 틀 것이다. 두 나라가 서로 공존하면서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과 보상문제, 전력과 수자원의 배분 문제 같은 실무적인 현안들은 얼마든지 협상을 통해 합의점에 도달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랍인들의 요구는 분명하고 원칙적이다. 미국이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을 다 해달라는 것이고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최종 판결이나 국제법, 유엔 안보리결의안을 아랍은 물론 이스라엘도 동시에 준수하도록 국제사회가 압박을 가해달라는 것이다. 평화는 의외로 가까이 와 있다.
이 희 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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