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오상순은 많은 시를 남기지 않았다. 작품보다 담배로 더 유명했다. 공초라는 호를 빗대 꽁초라 불렸다. 세수할 때도 손가락엔 담배가 들려 있었다. 하루에 200개비 정도 피웠다 하니 족히 한 보루다. 1894년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 칠순 직전까지는 살다 갔다. 살아있을 당시 건강이 어땠는지 나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문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명동의 술집이나 카페에선 늘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창작보다는 통 큰 허무의식을 기반 삼은 속 깊은 언변과 품행으로 후배 문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박인환, 김수영 등도 거기 속한다. 요컨대 당시 문단의 거사(居士) 어른이었던 셈.
얼마 전 명동에 나갔다가 한 백화점 앞길에 흡연부스가 설치되어 있는 걸 보고 그가 떠올랐다. 좁아터진 유리상자 안에 갇혀 뜨악한 표정으로 연기를 뿜는 사람들. 마뜩잖았지만 담배가 급해 거기 들어갔다. 무슨 우리 속 원숭이가 된 기분. 그래도 담배는 맛있었다. 공초가 이 장면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잠깐 상상했다. 그는 생전에 “앉은 자리가 꽃자리다”란 말을 즐겨 했단다. 지금 명동은 꽃자리는커녕 가시덩굴이나 진배없지만, 담배 끊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꽃자리는 마음에 있거나 없겠지. 스스로 세상을 꽃자리로 만든 자가 시를 써 뭣 하겠는가. 꽁초를 버리고 부스를 나왔다. 매연이 더 독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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