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직급 주기별 교육 세분화
퇴직 3년내 협력사 취업 금지 등
유착 관계 근절 대책도 강화
공공기관 청렴 등급 2계단 상승
“친구야, 이번 너희 회사 입찰 우리 회사에서도 들어간다. 네가 실무자니까 네 의견 무시할 수가 없을 거야. 안 그래?”
“여보, 자기 부서에 이번에 신규 채용 있다고 그랬잖아. 어떻게 힘 좀 써보면 안 될까?”
공직에 있는 정진기씨는 일상생활이나 업무처리 중 이런 상황에 늘상 부딪히게 된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쉬운 유혹에 내몰리기도 한다. 나름대로 상식이 통하는 나라, 청렴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숱한 유혹을 뿌리쳐왔다 자부하지만, 매순간이 쉽지만은 않다.
정진기씨는 물론 가상의 인물이다. 최근 한국수력원자력 직원들이 본 연극 ‘정진기씨의 하루’에 등장한 주인공이다. 직원들이 관객의 입장에서 평범한 공직자 정씨의 일상을 그린 연극을 보면서 ‘나는 과연 청렴한 사람인가’라고 스스로 묻고 답해 보라고 한 것이다. 올해 한수원이 내세운 핵심 비전인 ‘신뢰’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청렴과 윤리에 대한 직원들 각자의 의지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2012~13년 원전 부품 시험성적서 위조를 비롯한 납품 비리, 올해 원전 건설현장 근로자 사망사고 등 원전을 둘러싼 악재들이 최근 몇 년 간 끊이지 않았다. 한수원의 신뢰성은 큰 손상을 이었다. 한수원은 그만큼 절박했다. 회사의 존재 이유가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만큼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게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봤다.
사내 청렴윤리 교육 방식을 확 바꾼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관련 내용을 전달하는 딱딱하고 무거운 강의식에서 벗어나 연극, 콘서트, 토론, 붓글씨 등을 덧붙였다. 직원들이 직접 체험하고 느끼면서 스스로 깨달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서다. 이 가운데 한수원 직원들로부터 특히 인기를 끌었던 것이 연극 ‘정진기씨의 하루’다. 공공기관 종사자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접해봤을 고민과 유혹을 재미있게 풀어냈다는 호평을 이끌어냈다. 한수원은 앞으로도 이 연극에 회사의 실제 사례를 적용한 시나리오를 지속적으로 개발해 더욱 생생한 청렴교육을 시행할 계획이다.
또 하나의 아이디어도 보탰다. 나이와 직급 등 생애주기별로 청렴교육을 세분화했다. 전 직원이 청렴교육 대상이니 연령별, 직급별 차이도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신입직원은 공직자로서 기본 자세를 다지고, 고위직은 청렴리더십 교육을 통해 초심을 잃지 않도록 독려하는 내용으로 꾸몄다.
임직원을 넘어서 청렴의 범위를 확산하기 위해 한수원은 직원 가족과 협력회사 직원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는 ‘함께해요! 한수원의 윤리딜레마 UCC’공모도 시작했다. 업무 중 경험할 수 있는 윤리적 딜레마 사례를 만들어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동영상으로 제작한 것이다. “임직원 뿐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윤리의식을 내재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한수원 관계자는 설명했다.
한수원은 직원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5대 핵심 가치로 기술, 존중, 안전, 사회적 책임, 정도(正道)를 제시했다. 이 가운데 정도는 모든 업무를 엄격한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원칙과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뿐 아니라 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원전 납품을 둘러싼 비리 발생을 차단하기 위해 ‘원전기자재 추적관리 정보기술(IT) 시스템’을 도입, 2013년 전 원전에 적용했다. 모든 기자재의 입고부터 출고, 사용, 폐기, 반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투명하게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이다. 한수원 관계자는 “따로따로 운영해왔던 자재관리, 정비관리, 기자재 반출입 통제관리 시스템들을 서로 연계해 공통망으로 구축한 결과 합리적인 원전 기자재 관리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또 협력회사와의 유착 관계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도 강화했다. 가령 퇴직자(2직급 이상)가 퇴직일로부터 3년간 협력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명문화했다. 이를 위반한 협력사에 대해서는 입찰 때 신인도 감점은 물론, 공급자 등록 취소까지도 가능하다. 여기에다 업무 관련 기업 투자 금지, 직원 본인(2직급 이상)과 배우자의 재산 등록 의무화, 친족 공급업체 사실 신고 등도 제도화했다. 10만원 미만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아도 부당행위가 수반됐다면 해임이 가능하도록 징계 기준을 높였다.
국민권익위원회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에서 2012, 2013년 연속 5등급을 받았던 한수원은 이 같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난해 두 단계 올라선 3등급을 달성했다. 부패방지시책평가에선 한 단계 상승해 2등급이 됐고, 지난해엔 감사원으로부터 자체감사 우수기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조석 한수원 사장은 “기업의 경쟁력은 물론 사활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윤리경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며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공감하는 청렴?윤리경영을 펼쳐 국민의 신뢰를 받는 한수원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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