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영화 ‘암살’에는 억압적인 일제강점기의 모습이 나온다. 친일파 처단을 위해 경성에 숨어든 안옥윤(전지현) 일행은 경성역에 도착하자마자 일장기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오후 6시 시보와 함께 국기하강식이 이뤄질 때다. ‘국제시장’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덕수(황정민)와 영자(김윤진)가 부부싸움을 하다말고 국기하강식을 맞아 태극기를 향해 예를 표하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다. 어떤 이는 사적인 감정마저 국가에 의해 통제되던 시대의 공기를 담아냈다고 말하고, 또 박근혜 대통령처럼 지극한 애국심의 표현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국제시장’의 국기하강식 장면을 애국심으로 연결시키는 시선에 불만을 품은 관객이라면 ‘암살’을 보며 은근한 통쾌함을 느낄 수도 있다. 국기하강식이 애국심을 표현한다고 하나 일본제국주의에서 비롯된 식민지배의 잔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암살’은 ‘국제시장’과 연계 지어 관람하면 음미할 만한 내용이 꽤 많다.
‘암살’의 안옥윤은 자기가 죽여야 할 대상이 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쌍둥이 언니 미쓰코가 경성에서 ‘공주’처럼 살고 있다는, 가족에 얽힌 비밀도 알게 된다. 안옥윤과 대면한 미쓰코는 친일파 거두인 아버지 강인국을 옹호한다. “여기서는 다들 그렇게 살아. 아빠는 좋은 분이야.”
‘국제시장’은 불우했던 시절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소시민의 이야기다. 덕수는 부당한 권력이나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저항하기보다 가족을 위해서 험한 삶을 감내했던 보통 사람들을 상징한다. 덕수는 자신을 버리며 가족을 지켰으나 주변은 그를 딱히 훌륭하거나 ‘좋은 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권위적인 남편인데다 자식들과의 소통에도 실패한 고집불통 노인네로 취급한다. 우리 현대사의 숨은 영웅들을 그렇게 외면한 것에 관객은 죄책감을 느끼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국제시장’이 1,425만 관객을 울리고 웃긴 요인이다.
‘암살’은 ‘국제시장’과 달리 현실에 순응하길 거부했던 독립군을 스크린 중심에 둔다. 일제 앞잡이로 일하던 영화 속 염석진(이정재)은 해방 뒤 변절의 이유로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때는 정말 몰랐거든. 이런 날이 올 줄을.” 실낱 같은 희망을 위해 목숨을 버린 독립군의 기개를 돋보이게 하는 대사다. 하지만 독립군은 친일파에 밀려 해방 뒤 덕수처럼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국제시장’과 ‘암살’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대 한국사회의 주춧돌이 된 영웅들을 스크린에 돋을새김한다. 역사에 묻힌 무명의 영웅들을 되살려낸 ‘암살’이 ‘국제시장’ 못지않은 흥행 성적을 거뒀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닐까.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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