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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선고받고 떠난 여행, 13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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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선고받고 떠난 여행, 13년이 흘렀다

입력
2015.07.2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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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태 산문집 '단테처럼…' 출간

객사 각오하고 떠난 여행 경험

삶에 대한 질문·철학적 사유 녹여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여행을 떠난 전규태 시인이 10여년 만에 산문집 '단테처럼 여행하기'를 펴내고 28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열림원 제공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여행을 떠난 전규태 시인이 10여년 만에 산문집 '단테처럼 여행하기'를 펴내고 28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열림원 제공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전규태(83)씨가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건은 1998년이다. 아내의 실수로 거액의 부채를 떠안고 파산한지 2년 만에 췌장암에 걸린 그에게 의사는 “이제부터 출가한 것처럼 사시라”고 조언했다. 스트레스의 주원인인 인간들 사이를 떠나 좋아하는 여행을 즐기면서 객사하는 것이, 그에게나 가족들에게나 나을 것이란 얘기였다. 객사를 각오하고 떠난 여행은 3개월을 넘고 3년을 지나 13년에 이르렀다. 그는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다. 죽음을 삶으로 바꾼 여행에 관한 단상들을 그는 산문집 ‘단테처럼 여행하기’(열림원)를 통해 풀어놨다.

28일 책 출간을 기념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씨는 “지구를 열 두 바퀴 남짓 도는 동안 시 한 편 안 썼다”고 말했다. “의사가 신신당부한 것 중 하나가 문필을 꺾으라는 거였습니다. 대신 화필을 들라고 하더라고요. 대체 둘의 차이가 뭡니까 물으니 글은 잘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를 유발하지만 그림은 안 그렇다는 겁니다.”

전씨는 그 충고를 성실히 따라 호주를 기반 삼아 전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일체의 글을 쓰지 않았다. 한국 고전문학사와 현대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연결한 첫 연구자이자 해외에서 한국학을 가장 오래 강의한 교육자, 100권이 넘는 책의 저자로서 화려했던 문인 인생이 끝장나는 격이었지만, 죽으러 떠난 여행길에 미련은 없었다. 연필 대신 화구를 들쳐 메고 이집트, 아라비아 사막, 파리, 베를린, 프라하, 로마 등을 종횡무진하는 동안 그가 배운 것은 ‘나그네로서의 삶’이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자는 나그네일 수 없다. 하지만 고향을 찾으려 하지 않는 자 또한 진정한 나그네가 아니다. 여기에 여행의 묘미가 있다. 이 모순을 제대로 감당하고 극복하는 자만이 나그네로서의 삶을 그만두지 않고 끝내 그리던 고향을 찾아낼 수 있다.”(92쪽)

가능하면 마지막까지 나그네로 살고 싶었던 전씨는 2011년 잠깐 한국을 찾았을 때 호주의 거주하던 마을에 큰 불이 난 것을 계기로 눌러 앉게 됐다. 전씨에게 다시 문필을 들린 것은 ‘무진기행’의 김승옥 작가다. 대학생 시절 전씨의 집에 머물며 신세를 졌던 김씨가 그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함께 번역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재개된 글쓰기는 다시 시집과 산문집의 왕성한 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씨는 상황이 허락된다면 1988년 국내 최초로 몽골로이드 유적지를 탐사한 화보집 ‘마지막 원시인’을 좀더 쉽게 개정해서 펴내고 싶다고 말했다. “글쓰기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지만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냐는 생각으로 마음껏 씁니다. 그런데 의사가 깜짝 놀랄 만큼 몸이 건강해요. 아무래도 좀 더 일하다 죽으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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