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산지 하면 얕은 구릉을 따라 넓게 펼쳐진 포도밭을 떠올리기 쉽지만, 세계적 프리미엄 와인 중에는 산악지대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 것들이 많다.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몬테와 남부의 시칠리아 화산지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 등이 대표적이다. 척박한 토양의 산꼭대기에서 부족한 수분, 강한 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열매를 맺는 산악지대의 포도는 껍질이 두껍고 과육이 작아 응축된 맛과 뛰어난 타닌 표현력으로 와인의 럭셔리를 구현한다.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자라난 포도만이 낼 수 있는 거칠고도 진한 맛. 고진감래(苦盡甘來)가 꼭 인간사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나파밸리의 와인명가 잭슨패밀리가 ‘로버트 파커 지수’ 100점짜리 ‘로코야 마운트 비더 2012’를 비롯한 9종의 산악와인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로코야 4종, 라호타와 마운틴 브레이브 각 2종, 카디날 1종으로, 나머지 와인들도 98점을 받은 카디날을 비롯해 빈티지 차트의 최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는 명품들이다. ’파리의 심판’을 통해 월드 클래스의 반열에 오른 나파의 와인들은 프랑스와 이태리와 칠레를 두루 돌아 와인의 신대륙을 찾고자 하는 와인애호가들의 기항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파리의 심판’은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와인시음 대회에서 당시로선 ‘듣보잡’이었던 미국 와인이 프랑스 5대 샤토를 누르고 전 분야에서 1위를 석권했던 일대 사건.
나파 산악지형은 일단 포도를 심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자동차 크기만한 수백톤의 거친 암석을 뽑아내는 데 1에이커(약 4,000㎡)당 20만달러의 막대한 비용이 든다. 심은 후에는 화산재와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거친 토양과 강한 바람으로 인해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포도나무를 세심하게 보살펴야 하고, 익는 시기가 고도마다 달라 수확도 여러 단계로 나눠서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열매도 잘아서 7년 된 나무의 포도송이가 다른 지역의 2년산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매우 희소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파의 와인메이커들이 산악 와인을 고집하는 것은 다른 와인산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기후로 인해 와인의 다채로운 복합미(complexity)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 태평양의 차가운 공기가 나파의 골짜기로 밀려들면 더운 공기는 산 꼭대기의 포도밭으로 올라가는 덕분에 밤에는 따뜻하고 낮에는 시원한, 일교차가 적은 기후가 형성된다. 포도의 생장기간이 길어져 수확시기도 다른 산지에 비해 늦다. 아침에 형성되는 안개보다 포도 산지의 고도가 더 높기 때문에 포도가 안개에 젖는 일도 거의 없고, 서리 피해 역시 적다. 경주마와 같이 거친 나파 포도의 타닌을 섬세하게 조련하는 것이 양조활동의 핵심. 잭슨패밀리의 양조책임자인 크리스 카펜터씨는 최근 서울에서 열린 와인 출시 행사에서 “나파의 다양한 재배환경에서 나온 포도를 최적의 비율로 섞어 최고의 맛을 만들어내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빚어내는 것과 마찬가지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나파의 와인은 유럽에서는 다소 경멸적으로 쓰이는 ‘러스틱(rustic)’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바꿨다. 본래 시골풍의 소박한 것을 이르는 이 형용사는 와인에서는 우아함이나 정교함이 부족한 와인을 묘사하는 데 쓰였지만, 나파의 산악와인은 경작지에서 생산된 반질반질한 열매가 아닌 야생의 열매가 촉발하는 강렬한 미각적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타닌의 전체적인 조화가 저지대의 와인보다 뛰어나고, 입안에서 음미하는 동안 그 강렬함이 와인의 구조감이나 질감 등, 맛의 나머지 요소들과 이루는 조화가 빼어나다는 평가다. 이번에 국내 출시된 잭슨패밀리의 와인들은 국내 판매가 30만~100만원대로 예상된다.
박선영기자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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