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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노병들 "전우들 죽음 헛되지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입력
2015.07.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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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소총ㆍ수류탄 들고 진지 올라

적군 유인 총알받이 자처하고

"폐허 딛고선 발전에 존경ㆍ감탄

긴세월 흘렀지만 보은에 감사"

한국전 참전용사인 헥터 캐퍼래타(가운데)와 윌리엄 스피크맨(오른쪽)이 27일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62주년 기념식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 공군 예비역 중장인 윈턴 마샬(왼쪽)은 이날 국민훈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 제공
한국전 참전용사인 헥터 캐퍼래타(가운데)와 윌리엄 스피크맨(오른쪽)이 27일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 62주년 기념식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 공군 예비역 중장인 윈턴 마샬(왼쪽)은 이날 국민훈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 제공

20대 벽안의 청년들에게 ‘코리아’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땅이었다. 그저 자유의 가치를 수호하고, 곁에 있는 동지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발을 내디딘 한국전쟁은 그들의 인생을 180도 바꿔놨다. 세월이 흘러 이제 백발이 성성해진 노병들에게 코리아는 이제 ‘제2의 조국’이 됐다.

미 해병 출신인 헥터 캐퍼래타(86)씨와 영국 육군 출신인 윌리엄 스피크맨(88)씨가 27일 ‘정전협정 및 유엔군참전의 날’62주년 기념식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태극무공훈장은 5등급으로 나뉘어진 무공훈장 중에서도 가장 훈격이 높다. 정부는 195만 명의 유엔군 참전용사에 대한 희생과 공헌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지난해부터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을 선정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미군, 터키군 등 5명이 받았다.

이날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황교안 국무총리는 두 사람에게 직접 태극무공훈장을 달아주고, 보랏빛이 감도는 어깨띠를 몸에 둘러주며 감사를 표시했다. 노병들은 휠체어를 타고 단상에 오를 정도로 기력이 쇠했지만, 감격에 찬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벌써 3번째 방한길에 나선 캐퍼래타씨는 “7년 전 전우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이 이렇게 발전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는 얘기를 나눴다”며 “한국군과 함께 한국을 지켜낸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훈장까지 받게 돼 너무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동안 이들은 그야말로 숨은 영웅이었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던 50년 11월 29일 함남 장진호 전투에서 당시 미 해병대 소총수(일병)였던 캐퍼래타씨는 부대가 중공군에 포위됐음에도 항복하지 않고 홀로 소총과 수류탄을 들고 진지 꼭대기에 올라 적을 유도하는 표적을 자처하며 밤새 버텼다.

무모할 수도 있는 그의 용맹을 방패로 부상당한 채 누워있던 동료들은 적의 추가 공격을 피할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 미군 포병의 지원 사격으로 중공군은 부랴부랴 물러갔다. “미 해병대는 절대로 적들에게 항복하지 않고 명예롭게 싸우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저는 단지 제 전우들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을 뿐 입니다.” 이들이 버텨준 덕분에 12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 남하가 지연됐고,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질 수 있었다.

스피크맨씨는 아직도 전우들 사이에서 ‘맥주병을 든 사나이(Beer Bottle Man)’로 통한다. 51년 당시 육군 병장으로 휴전선 부근에서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던 중 수류탄과 실탄이 떨어지자 전투보급품으로 공급받은 빈 맥주병까지 던져가며 육탄전을 벌였던 일화로 붙여진 별명이다. “주위에 있는 돌이라도 들어 부대원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던 그에게 영국 왕실은 최고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Victoria Cross)’을 내렸다. 그는 한국전쟁 빅토리아 수훈자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보훈처는 이날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한 나머지 두 명의 숨은 영웅들에게도 별도의 현지 행사를 통해 훈장을 전달한다는 방침이다. 51년 연천 고왕산 전투에서 단 한 명의 소대원도 잃지 않고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낸 캐나다의 전쟁영웅 에드워드 존 메스트로나디(90)씨와 한국에서만 27번의 전투를 수행한 미 해군 대위 토머스 허드너 주니어(91)씨다.

75년부터 국제 보훈외교의 일환으로 시작된 참전용사 재방한 행사를 통해 지난해까지 3만 여명의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한국을 다녀갔다. 이들 대부분은 “은혜를 갚겠다고 우리를 초청해주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캐퍼래타씨는 “전쟁 후 한국은 폐허가 됐지만, 지금의 한국은 발전돼 감탄이 절로 나온다”며 “어린아이부터 청년들까지 한국에 대한 존경심이 강해 매우 자랑스럽고, (이런 모습을 보니) 제 전우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것 같다”고 뿌듯해 했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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