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비가 왔고, 문득 빗속을 걷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우산을 챙겨 들고 집 앞 천변으로 나갔다. 평소완 다르게 대뜸, 방울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굳이 나무를 보려고 나간 건 아니었는데, 뭔가에 홀린 듯 나무만 바라봤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니 천변의 다른 풍경이 포커스아웃 되는 느낌이었다. 산책로도, 운동기구도, 잘 꾸며놓은 수풀과 징검다리도 마치 빗줄기가 지워버린 듯 시야에서 흐릿하게 사라졌다. 빗소리만 파문을 일으키며 반향할 뿐, 세상이 고요해진 느낌이었다. 빗소리가 만들어놓은 보이지 않는 조그만 원 안에 오로지 나와 나무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새삼 귀를 쫑긋 세웠다. 비 내리는 세상에 둘만 남은 상태로 나무가 내게 무슨 말을 걸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고 비 맞은 이파리들이 서늘하게 떨리는 것 말곤 별다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평소에 듣기 힘든 무슨 소릴 일깨운 듯 귀가 충만해졌다. 어제나 그제쯤 귀 따갑게 들었던 피곤한 이야기들이 깨끗하게 씻겨나가는 듯싶었다. 비가 오길 기다려 온몸으로 말을 토하는 나무가 짐짓 숭고해 보였다. 문득, 오늘은 시가 써질 것 같아, 그게 찬연하기도 슬프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나무가 온몸이 귀가 되어 운다, 라고 첫 문장을 썼다. 완성되면 나무의 말로 통역해 읽어줄 수 있을까.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