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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팔아먹는다는 말 상처로 남았지만… 잘들 자라줘서 고마울 뿐"

입력
2015.07.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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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서 어떻게 지내는지 기록으로 확인 가능해 신뢰

친자식들 학교엔 거의 못 가봐… 눈 감는 날까지 내내 미안할 것

조병국(왼쪽)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이 23일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성인이 돼 한국을 다시 찾은 해외입양인 엘린 램버그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조병국(왼쪽)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이 23일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성인이 돼 한국을 다시 찾은 해외입양인 엘린 램버그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입양아들의 주치의로 통하는 조병국(82)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에게 의사란 어떤 직업인 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직업”이라는 답이 돌아 왔다. 그는 의사로 살아온 50여년을 피투성이에 오줌 똥 가리지 못하는 장애아들과 보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도 못하던 1960년대, 지금은 백신 하나로 예방할 수 있는 전염병, 항생제만 있으면 나을 수 있는 폐렴 등으로 죽어 나간 아이들의 사망 진단서를 하루에도 수차례 썼다. 귀가 부어 청진기를 꽂지 못할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죽은 동생들과 6.25 전쟁 때 죽은 엄마 등에 업혀 울던 아이들을 보며 평생 소아과 의사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날 이때까지 흔들려 본 적이 없다.

조 원장은 부모가 버린 뒤 장애 때문에 입양을 가지 못한 250명과 경기 고양시 탄현동에 자리잡은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살고 있다. 돌을 갓 지난 아기부터 예순 넘은 고령자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부모 없는 아이들의 치료와 입양 지원에 50여년을 바친 조 원장은 지난 13일 JW중외그룹의 공익재단인 중외학술복지재단이 수여하는 제3회 성천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성천상은 JW중외그룹 창업자인 고 성천 이기석 사장의 생명존중 정신을 기려 헌신적 의료봉사로 사회 귀감이 되는 의료인 발굴을 위해 2013년 제정됐다.

평생을 참 의사로 살아온 그를 홀트일산복지타운 내 카페에서 만났다.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순간 조 원장이 카페 창가 쪽 테이블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노르웨이인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한국인 여성 엘린 램버그씨가 조 원장을 포옹했다. 해외입양을 허가하는 신체검사 확인서에 서명한 ‘닥터 조’를 찾아온 그는 흔쾌히 합석했다.

1970년대 초 노르웨이로 입양 직후 엘린 램버그씨의 모습. 램버그씨 제공
1970년대 초 노르웨이로 입양 직후 엘린 램버그씨의 모습. 램버그씨 제공
조병국(맨 왼쪽)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이 23일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어른이 돼 한국을 다시 찾은 해외입양인 엘린 램버그(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씨 가족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조병국(맨 왼쪽)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 명예원장이 23일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어른이 돼 한국을 다시 찾은 해외입양인 엘린 램버그(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씨 가족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_램버그씨는 한국말을 할 수 있나.

램버그씨: “전혀 못한다. 1971년 대구 시내 길거리에 버려졌는데 고아원 두어 곳을 거쳐 홀트아동복지회로 들어왔다. 이듬해 홀트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을 때 조 원장이 입양 허가 서명을 해줬다. 덕분에 노르웨이에서 양부모를 만나 잘 자랐다. 한국 이름은 오화정이다. 누가 지어줬는지 모른다.”

_가족들과 한국 여행 중인가.

램버그씨: “7세 딸이 엄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길래 한국인이라고 대답해 줬더니 가보고 싶다고 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불고기와 김치, 잡채를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 엄마의 나라에 처음 와본 딸은 ‘(노르웨이와) 다르지만 좋다’고 표현했다. 모국 방문은 이번이 3번째다. 해외입양 후 18세가 되면 한국에 와 자신의 입양 전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서 그때 처음 왔다. 이후 1986년 연세대 어학당에서 5개월간 공부했다. 방문 때마다 조 원장을 만났다.”

_조 원장은 램버그씨를 기억하나.

조 원장: “원체 많은 아이들을 돌봤던 터라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앞서 두 번의 만남도 가물가물하다. 건강했던 아이들은 사실 더 기억이 나지 않는다(웃음). 당시 많이 아프거나 생명이 위태로웠던 아이들에게 신경이 쏠려 있었다. 양부모를 만나 잘 자라줘 고맙고 가정을 이뤄 여행 다니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인다. 남편은 어떻게 만났나.”

램버그씨: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 만났다. 노르웨이로 돌아와 결혼한 뒤 지금은 오슬로 외곽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살고 있다.” (램버그씨는 이후 여정을 위해 자리를 떴다.)

_직접 입양 서류에 서명한 아이를 다시 만나니 어떤가.

“흐뭇하고 좋다는 것 말고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나. 밝고 건강하게 자라 공부하고 결혼도 해서 자식들을 데리고 다시 고향을 찾아온 것을 보면 양부모가 참 좋은 분들 같다. 내 자식인들 저렇게 훌륭하게 키우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나. 먹고 살기 힘들던 1960~70년대 버려진 아이들에게 가정을 찾아주려고 국내외에 입양시켰는데 1988년 서울올림픽 즈음 살림살이가 나아지니 해외입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 들었던 ‘애 팔아먹는다’는 말이 아직까지 상처로 남았다.”

_입양간 뒤 어른이 돼 찾아온 아이들이 예전에도 있었나.

“한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기찻길로 뛰어들었는데 아이만 용케 살아났다. 하지만 무릎 아래 두 다리를 잃어 입양이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얼마 뒤 의료기기 일을 하는 미국인이 입양 의사를 밝혔다. 더구나 그에게 첫 아이였다. 장애가 있는데 정말 키우겠느냐고 두 번 세 번 확인 끝에 보냈다. 몇 년이 지나 그 미국인이 의족을 하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의 사진을 보내왔다. 그날 사진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또 뇌성마비 때문에 9세 때 친부모가 버려 홀트로 왔다가 미국으로 입양 간 영수란 아이는 몇 년 전 어엿한 의대생이 돼서 찾아왔다. 영수는 결혼 후 낳은 딸들의 이름을 홀트와 병국이라고 지었다.”

_해외입양 보내는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을 텐데.

“보낼 때 참 안됐고 불쌍했다. 하지만 당시 해외 입양은 아이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자랐는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 국내보다 더 신뢰가 갔다. 잘 자라서 모국을 방문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결국 내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_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0년대 서울시립아동병원에서 일할 때도 버려진 아이들을 치료하고 돌봤다. 당시 진료 환경은 어땠나.

“여름날 월요일 아침으로 기억한다. 출근해서 아이들 사망진단서를 내리 13장이나 썼다. 주말 동안 죽은 아이들이다. 그땐 ‘어쩔 수 없다, 내 능력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적 드문 거리나 공용 화장실에 살기 힘든 부모들이 아이를 버리던 시대였다. 거리에서 아이들이 발견되면 우리 병원으로 보냈다. 그 중 많은 아이들이 지금은 기본 예방접종 대상인 백일해, 디프테리아, 장티푸스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폐렴에 걸려도 항생제가 없어 기증받은 해열제나 수액으로 아이들을 치료했다.”

_의사로서 정말 답답하고 화가 났겠다.

“말도 못한다. 한번은 회진을 돌다가 폐렴 증상이 심해 산소호흡을 시키는 아이의 목을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조르는 것을 봤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파출소에서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냐고 용서해주자는 것을 난 도저히 용서 못 하겠다며 나와버렸다.”

_병원에서도 조 원장의 손길이 계속 필요했을 텐데, 1974년 왜 그만두고 굳이 입양기관으로 옮겼나.

“더 많은 아이들을 받으려고 병원을 확장할 생각이었다. 건물을 증설하려니 주변 수도시설을 옮겨야 하는 등 행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담당 공공기관에 얘기했더니 시립병원 소아과장 따위가 공무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미운 털이 박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아이들을 위해 그 정도도 못한다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평생 고아들을 돌볼 거라면 입양이라는 희망이 있는 홀트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_월급이 많이 깎이고 근무 환경도 나빴을 텐데.

“병원에서 월 120만원 받았는데 홀트로 오니 90만원으로 확 줄더라(웃음). 하지만 버려진 아이들, 특히 장애아에게 돌봄이 절실했다. 진료에 기록 업무까지 많게는 하루에 환자 125명을 처리했다. 90명 정도 진료보고 나면 귀가 아파 청진기를 더는 대지 못할 정도였다. 오후 4시쯤이면 등에서 땀이 흐르고 머릿속이 멍해지며 몸이 붕 뜨는 듯했다.”

_매일 그리 강행군했는데 건강은 괜찮나.

“신경마비로 손이 저려 펜을 잡고 쓸 수 없게 됐다. 쉬려고 잠시 홀트를 나가 20개월 정도 개원했다가 선배 의사를 만나러 홀트에 들렀는데 갑작스럽게 응급환자가 발생한 바람에 그 자리에서 진료를 시작했고 결국 다시 돌아왔다.”

_그렇게 운명처럼 홀트를 지킨 지 40년이다. 후임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많은 의사와 간호사가 거쳐갔다. 하지만 짧으면 3개월, 길어야 4, 5개월이다. 박봉에 어려운 진료를 도맡아야 하니 모두 떠났다.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의료인도 마찬가지다. 중환자실에 데려다 놓고 싶을 만큼 상태가 심각한 아이들이 지금도 여럿이다. 이 아이들을 위해 의료 인력 확대가 필수다. 봉사하는 마음에만 기댈 수 없다. 쉽지 않은 일을 하겠다는 의료인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

_평생 남의 아이들을 돌보며 지냈는데, 정작 자녀들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애들 어릴 때 학교에 거의 가보지 못했다. 지금 하나는 서울 살고, 둘은 캐나다로 이민 갔다. 이민 간 손자는 호흡기질환이 심했다. 눈 감는 날까지 내내 미안할 것이다.” (조 원장의 남편은 한양대 구리병원장을 지낸 이비인후과 전문의 고 김선곤 박사다.)

_자녀들을 위해 존경받는 의사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어린 시절 아픈데 손도 못 써보고 세상을 등진 동생들과 전쟁 피난길에 죽은 엄마 등에 업혀 울던 아이를 보며 소아과 의사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존경받으려고 의사 된 것이 아니다. 피투성이에 오줌똥 못 가리는 아이들을 평생 봐온 내게 의사란 제일 지저분한 직업이다.”

_성천상 상금이 1억원이다. 어디에 쓸 계획인가.

“아직 고민 중이다. 부모 없고 아픈 아이들보다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의료후원 목적 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

임소형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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