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안보조약에 항의 교수직 사퇴
자유주의 입장서 광범위한 비평활동
군사독재시절 김지하 지원 인연도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중심에 서며 사상ㆍ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 쓰루미 순스케(鶴見俊輔)가 세상을 떠났다. 최근까지 자위대 해외파병 등 전쟁에 반대하던 상징적 인물이 별세했다고 일본언론이 24일 보도했다. 향년 93세.
1922년 도쿄의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8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무정부주의 혐의로 체포됐지만 유치장에서 논문을 쓰고 1942년에 졸업했다. 미일간 전쟁 개시 후 포로교환 절차로 귀국한 뒤 일본해군에서 군속으로 근무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교토인문과학연구소 조교수로 취임한 뒤 도쿄공대 교수가 되지만 1960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내각이 미일안보조약 개정안 비준을 강행한 데 항의하며 도쿄공대를 사직했다. 이후 문필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을 결성해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자유주의 입장에서 광범위한 비평활동을 한 그는 일본 문화계의 큰 별이었다. 만화나 영화, TV드라마, 연예분야 등에도 통찰력이 깊었고 자신의 대중문화론을 교토(京都)를 거점으로 펼쳤다. 현대 사상 및 대중문화론에 대한 공헌과 재야 상을 확립한 업적으로 1994년 아사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 그는 9ㆍ11 테러를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자위대의 해외파견 등에 반대 목소리를 더 높여갔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 등과 함께 평화헌법 수호를 주장하는 ‘9조의 모임’설립호소인으로 참여한 게 대표적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일관되게 주창한 고인은 한국과도 인연이 적지 않다. 군사독재정권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추방 처분을 당한 한국인들이 송환 때까지 구금됐던 오무라(大村)수용소(나가사키현) 폐지운동을 벌이고, 김지하 시인을 지원하기도 했다. 김지하 시인은 최근 몇 해전 언론 인터뷰에서 쓰루미가 자신에게 “천년 전 일본 교토 왕실에는 백제의 문화전통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쓰루미가 쓴 ‘전향(轉向)’이란 책은 1931년 중일전쟁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종결까지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본에서 국가권력에 대해 일본 지식인들이 보였던 사상적 방향전환을 다뤘다. 고인은 ‘전향’을 “국가의 강제력에 대해 사상가나 운동가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대응”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전쟁반대론자 등 지식인들이 천황제 국가주의에 굴복하는 과정을 구체사례들로 묘사했다. 그 외의 저서로 ‘전쟁시기 일본의 정신사’ ‘만화(漫畵)의 전후사상’ ‘한계 예술론’‘미국철학’ 등이 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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