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장교 생활을 마칠 즈음 군대 동기들은 하나같이 취업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다들 서른을 훌쩍 넘었고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의 여파로 일자리가 많지도 않았다. 그나마 금융권의 카드 회사와 함께 국가정보원(국정원)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줬다. 물론 국정원을 택하는데 주저하는 이들도 많았다. 대학 시절 선배들을 통해, 책을 통해 접한 국정원의 전신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등이 한국 현대사를 얼마나 암울하게 만들었던가를 떠올리며 망설였다.
그러나 취업이라는 현실의 벽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국정원 도전을 망설이며 고민하던 동기에게 이런 말을 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 이름도 국정원으로 바뀌고 이미지도 많이 좋아졌다. 예전처럼 간첩 때려잡고 잘못 없는 사람 데려다 고문하고 그런 건 아니잖아. 해봐.”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난 기자가 됐고 가끔 국정원 친구들과 얼굴을 봤다. 너무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네가 무슨 요원이냐’며 핀잔을 주면서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혈 인간으로 묘사되는 요원과는 달라 안도하기도 했다. 자세히 말을 하지도 묻지도 않았지만 그냥 나랑 똑 같은 회사원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국정원 친구들과 연락은 뜸해졌다. 여기저기서 정권이 과거의 서슬 퍼런 안기부, 국정원 때와는 사뭇 다른 국정원을 새로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국정원 위상이 예전 같지 않아지면서 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내부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말도 들렸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 걱정됐지만 묻기도 망설여졌다.
사회부 사건팀장을 맡던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터진 국정원 댓글 사건을 후배들과 취재하며 ‘설마 친구들이 이번 일과 연관되지 않았겠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설마 국정원이 국민 세금으로 직원과 민간인까지 동원해 이처럼 치졸한 일을 했을까 싶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나 국정원 해킹 의혹 사건이 터졌다. 국정원은 이탈리아 업체로부터 해킹 프로그램을 사들여 민간인을 사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자 “대북 정보전을 위한 연구용으로 썼을 뿐”이라며 부인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3년 전 댓글 사건 뒤 국정원의 대응과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남재준,원세훈 전 원장 모두 “정상적 대북 사이버 방어 심리전”이라고 주장했었다.
대한민국을 책임진다는 정보기관이 이 정도 밖에 안되나 하는 답답함이 들던 중 이번에는 한술 더 떠 국정원이 직원 공동명의라며 ‘동료 직원을 보내며’라는 성명서를 공개했다. 자살한 동료 직원의 죽음에 대해 정치적 공세가 이어지는 것에 대해 개탄한다는 그 성명서를 접하며 난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내가 겪어 본 국정원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국정원이 국민들로부터 비난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조직을 활용하려는 일부 몰지각한 윗사람과 정권 실세들의 잘못 때문일 것이라 믿었다. 자신들이 곤란해 지면 입이 닳도록 ‘해외 정보 기관이 국민들로부터 얼마나 존중 받는 지를 비교해 달라’며 억울해 하던 것도 바로 그 윗사람들의 핑계일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정말 (친구들을 포함한) 그 직원들이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정보기관 직원들도 하지 않은 성명서까지 내놓았을까. 지금도 난 그 성명서를 직원들이 만든 것이라 믿고 싶지 않다. 그건 지금껏 내가 국정원 직원들에게 가졌던 작은 기대와 믿음마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난 국정원이 시간이 지나면 잃어버린 신뢰도 되찾고 국민들로부터 진정 지지를 받는 조직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왔다. 그 안에 있는 친구들과 내가 아는 이들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국정원 정문 앞 바위에 새겨진 이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달라고.
정치부 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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